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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25년 전 찾았던 우크라 하르키우[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입력 2022-04-01 03:00업데이트 2022-04-01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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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를 방문한 것은 25년 전이다. 당시 나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내가 있던 대학 연구실은 우크라이나의 V M 스비스타노프 교수를 초청했다. 그는 하르키우 저온연구소 소장으로, 극저온 실험에서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대가였다. 나는 그가 쓴 모든 논문을 외울 정도였다. 그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게 되다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거구의 체격답게, 그의 손은 과장되게 말하자면 내 손의 두 배였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어떻게 실험을 할까 했지만, 늘 정교한 손놀림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구소련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수학적 계산을 하곤 했는데, 그것 역시 감탄을 자아냈다. 서방세계에서 쉽게 익히기 어려웠던 저온물리학 전반에 대해 그에게서 속속들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을 좋아하던 그가 내가 빌려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져 다치는 일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의 수발까지 들었다. 깁스한 팔 때문에 내가 대신 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실험하는 동안 등 뒤에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그의 입에서 아침부터 보드카 향이 진동했다. 여러 일로 고됐지만, 그때 그에게서 어깨너머로 배운 물리학적 지식은 나를 학문적으로 한층 더 성숙시켰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나를 하르키우 저온연구소로 초대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기차를 타고 하르키우로 향했다. 지평선 끝까지 밀밭이 펼쳐진 광활하고 평화로운 우크라이나 평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풍경이다. 지금 그곳에 폭음이 울리고 탱크가 지나다니고 있다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하르키우 저온연구소는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가 세운 이공학 연구소에 속해 있었다. 란다우는 소련의 상징적인 천재 물리학자로, 1962년 액체 헬륨의 극저온 현상에 대한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다. 그의 이론은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꼭 거쳐야만 하는 이론 중 하나다.

란다우는 짧은 기간 덴마크, 영국 등 유럽에서 양자역학을 배우긴 했지만, 대부분의 연구를 소련에서 수행했다. 그중에서도 그만의 천재성을 발휘해 독자적인 현대물리학 이론을 완성한 것은 하르키우에 있을 때였다. 금속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자의 현상, 양자역학 계산에 사용되는 수학, 자기장 속에서 움직이는 입자의 운동, 플라스마 현상 및 초전도체 이론 등 그의 핵심적인 물리학 이론들은 모두 하르키우에서 완성됐다. 소련 물리학의 산실을 꼽는다면 단연 하르키우가 아닐까. 그 하르키우를 러시아군이 공격했다.

전쟁의 참화에 대한 우크라이나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익숙한 하르키우의 도시 풍경과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모습이 비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연구소를 지키던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란다우의 이름을 딴 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양자역학의 물리학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교과서 같은 저온연구소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주말이면 연구소 근처 강에서 수영하던 생각이 난다. 그 평화로웠던 기억 때문인지, 요즘 마음이 더 참담하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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