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이 미쳤다”… 우크라發 유가 급등에 美 휘발유 절도 기승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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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26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의 한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이 길게 늘어섰다. 다른 주유소에 비해 조금 싼 이곳에 휘발유를 넣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weappon@donga.com
26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의 한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이 길게 늘어섰다. 다른 주유소에 비해 조금 싼 이곳에 휘발유를 넣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weappon@donga.com
《26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의 한 주유소를 찾았다. 일요일 오전 7시인데도 100여 대의 차량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른 주유소에 비해 갤런당 약 30센트 싼 이곳에서 휘발유를 넣으려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몰려든 것이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집에서 20분가량 운전을 해 이 주유소를 찾았다는 얼리샤 씨는 “주말 아침이면 다들 잠을 자느라 주유소가 한적할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다”며 한숨을 쉬었다. 에번 씨 역시 “치솟는 기름값도 미쳤고 이렇게 긴 줄도 미쳤다”며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시간을 태우는 것 같다”고 했다.

3월 미 전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사상 최고치인 갤런당 평균 4.322달러를 기록했다. 2008년 7월의 기존 최고치 갤런당 4.114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지난달 24일 주요 산유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약 한 달간 국제 유가는 29% 오르고 미 휘발유 가격 또한 갤런당 1.30달러 상승한 여파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기름값 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라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당분간 유가 안정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이 러시아산 에너지의 수입을 금지하는 등 강도 높은 제재에 나섰고 공급망 교란 등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던 상황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바이든 행정부는 치솟는 기름값을 낮추기 위해 적성국가인 이란, 베네수엘라 등과의 관계 정상화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치솟는 기름값에 저소득층 타격
미국인은 기름값에 민감하다. 뉴욕 등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면 대중교통망이 극히 부족해 휘발유 구입 비용이 가계 지출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미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미 가계는 월평균 200달러(약 25만 원)를 휘발유 구입에 썼다. 지난해 12월과 비교하면 불과 3개월 만에 27%가 오른 휘발유값 때문에 매달 50달러 이상을 추가 지출해야 한다.

신용평가회사 무디스 또한 치솟는 기름값으로 미 가계가 1년에 1300달러(약 162만5000원)를 추가 지출할 것으로 예측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식료품 등 생필품 가격 상승까지 고려하면 가계 지출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미 50개 주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 일부 지역에서는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6달러를 넘어 저소득층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24일 미 자동차협회(AAA) 기준 캘리포니아 중서부 샌루이스오비스포에서는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6달러를 넘어섰다. 1갤런이 약 3.78L임을 감안하면 L당 2268원에 달한다.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4달러 선을 넘은 주 역시 17개에 달한다.

이로 인해 최근 주차된 자동차의 주유구를 드릴로 뚫은 후 기름을 훔쳐가는 ‘휘발유 절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최근 남부 텍사스주 휴스턴에선 바닥에 구멍을 뚫은 대형 차량을 주유소 지하 유류 저장고 위에 세워두고 저장고 문을 열어 기름을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플랫폼 노동자 또한 아우성이다. ABC뉴스에 따르면 16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레돈도 해변 인근에 있는 승차 공유업체 우버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 지사 앞에서는 우버 운전자와 아마존 배달원들이 ‘(연료통) 빈 채로 운행 중’ ‘우리는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다’는 문구가 쓰인 팻말을 들었다. 기름값 급등의 직격탄을 맞은 이들이 유가 보조를 요구하며 대형 플랫폼 업체를 상대로 시위에 나선 것이다.

홀로 두 자녀를 키우는 아마존 배달원 카트리나 코트 씨는 “기름값이 너무 든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회사에서 기름값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생계가 막막하다고 호소했다.

러 원유 대체재 못 찾는 美
23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주유소 간판에 갤런당 6.05달러라는 가격이 표시됐다. 캘리포니아는 미 50개 주 중 휘발유 가격이 가장 비싼 곳이어서 서민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23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주유소 간판에 갤런당 6.05달러라는 가격이 표시됐다. 캘리포니아는 미 50개 주 중 휘발유 가격이 가장 비싼 곳이어서 서민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2020년 기준 러시아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050만 배럴로 미국(1860만 배럴), 사우디아라비아(1101만 배럴)에 이은 세계 3위다.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금지의 후폭풍을 상쇄하기 위해 전략비축유를 풀고 이란, 베네수엘라 등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대안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원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베네수엘라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 행정부 출범 후 미국의 강도 높은 제재를 받아 채굴 및 정제 시설의 고도화 등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원유는 지천에 넘쳐나지만 이를 휘발유로 만들 수가 없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베네수엘라가 원유 생산량을 대폭 늘리려면 최소 4, 5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와 핵합의 복원 협상을 두고 막판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이란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세계 4위 원유 보유국인 이란은 베네수엘라보다 더 오랜 기간 서방의 제재를 받아 왔기에 생산량 확대를 위해서는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중동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 또한 미국의 증산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 인권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전부터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연루된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사우디 원유가 필요해지자 방공 무기를 지원하는 등 뒤늦게 관계 복원에 나섰지만 사우디 측은 바이든 대통령의 전화조차 받지 않고 있다.

사우디는 바이든 행정부가 청정에너지 정책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상당하다. 미국에 에너지 패권을 내줄 수 없다며 러시아까지 참여한 협의체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를 통해 세계 에너지 시장을 좌지우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이든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져
유가 상승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 행정부의 목을 죄고 있다. 27일 NBC방송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집권 후 최저치인 40%를 기록했다. 응답자의 83%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기름값 상승 등 물가 급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려된다”고 답했다.

일각에서는 2월 7.9% 상승을 기록해 40년 최고치를 보인 미 소비자물가가 조만간 8.0%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야당 공화당 의원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청정에너지 정책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며 정치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돼도 당분간 국제 유가의 안정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각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규제를 풀면서 전 세계에서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세를 잡지 못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11월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다수당 위치를 모두 공화당에 내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weappon@donga.com


#기름값#유가 급등#휘발유 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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