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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유(윤종)튜브]酒, 예술가의 뮤즈이자 어두운 유혹

입력 2022-02-22 03:00업데이트 2022-02-22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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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친구이자 화가인 악셀리 갈렌칼렐라의 그림 ‘심포지엄’. 오른쪽에 만취한 시벨리우스가 보인다.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1877년) 3악장은 여러모로 기묘하다. ‘스케르초’로 표기되어 있지만 통상의 스케르초에서 들을 수 있는 빠른 3박자 대신 2박자로 되어 있다. 게다가 현악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활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퉁기는 피치카토 주법으로 연주한다.

차이콥스키는 이 악장을 ‘술에 취하기 시작할 때 머리에 떠오르는 자유롭고 괴상한 상상들’이라고 설명했다. 중간에는 ‘취한 농부들과 거리에서 들리는 노랫가락’ ‘멀리서 들리는 군악대의 행진’도 표현된다.

이 교향곡에는 제목이 없다. 차이콥스키가 청중을 위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것을 밝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1악장부터 마지막 4악장까지 그가 나타내려 했던 것을 꽤 소상히 알 수 있다. 차이콥스키가 이 곡에 묘사한 내용들을 후원자인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악보와 함께 적어 보냈기 때문이다.

편지에 따르면 1악장은 ‘행복의 추구를 방해하는 운명’, 2악장은 ‘일에 지쳐 홀로 앉았을 때의 우울한 상념’, 4악장은 ‘민중의 축제’를 그렸다. 차이콥스키가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훗날 공개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내용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편지 덕분에 우리는 취한 차이콥스키의 머릿속까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술은 예술가들의 친구이자 영감을 자극하는 뮤즈(예술의 여신)였다. 그러나 뜻밖에 ‘술 취한 사람’을 표현한 음악 작품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집 ‘사계’에는 계절마다 각각의 곡을 표현한 소네트(짧은 정형시)가 붙어 있다. ‘가을’ 1악장은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수확을 축하하고 바커스의 술로 열기를 더한다. 연회는 잠으로 끝난다.”

두 세기 뒤인 20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레스피기가 ‘로마의 축제’ 4부 ‘주현절(La befana)’에서 그려낸 이탈리아인의 축제도 비슷하다. 예수의 신성(神性)이 나타난 것을 축하하는 축제를 맞이해 로마인들이 나보나 광장에서 펼치는 광란과도 같은 떠들썩한 모습들을 그렸다. 트럼펫 솔로를 비롯한 금관들이 표현하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닌 ‘고성방가’다.

말러의 ‘대지의 노래’는 가곡집과 교향곡 사이에 놓인 독특한 작품이다. 독일어로 번역된 옛 한시(漢詩)들을 가사로 사용했다. 여섯 개 악장 중 두 개가 술 노래다. 1악장 ‘지상의 괴로움을 노래하는 술 노래’는 술 권하는 노래다. ‘가득 찬 술잔은 세상 어떤 나라가 부럽지 않다’고 찬미하다가 순간 어두운 표정으로 ‘삶은 어둡다. 죽음도 그러하다’고 노래한다. 5악장의 ‘봄에 취한 자’에서는 ‘삶이 꿈에 지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할 건가. 차라리 흠뻑 취하리라’고 외친다.

노래가 함께하는 오페라는 어떨까. 유명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해서 여러 오페라에 ‘축배의 노래’가 나오지만 의외로 술 취한 사람을 그리는 장면은 많지 않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묘약’은 다름 아닌 와인이다. 돌팔이 약장수의 ‘이 약을 마시면 사람들이 자네를 사랑하게 된다’는 말만 믿고 순진한 총각 네모리노는 덥석 ‘약’을 사서 마신다.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네모리노는 사모하는 처녀 아디나 앞에서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아디나는 기분이 상하고 만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서 나잇값 못하는 늙은 신랑 옥스 남작이 부르는 ‘나 없으면’도 술 취한 장면의 노래다. 늦장가를 가게 된 옥스 남작은 신부의 집에 청혼 사절을 보냈지만 잘되어 가는지 보겠다며 직접 그 집으로 들어가 말썽을 피우고 만다. 신붓감은 그에게 크게 실망하고, 철없는 옥스 남작은 포도주에 취해 다른 여인과의 밀회를 꿈꾸며 흥겨운 왈츠를 흥얼거린다.

KBS교향악단이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피에타리 잉키넨 음악감독 지휘 정기연주회에서 연주할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얘기가 길어졌다. 바딤 레핀이 협연하는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등도 이날 연주된다.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는 계절, 술자리의 유혹도 많다. 하지만 술은 예술가의 뮤즈이기에 앞서 수많은 사고를 유발하는 어두운 유혹이기도 하다. 특히나 술 마신 채 운전대를 잡는 것은 절대 삼갈 일이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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