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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한 ‘천천히 보기’[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1-12-27 03:00업데이트 2021-12-2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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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영화 ‘퍼스트 카우’와 연말 보내기 ※이 글에는 ‘퍼스트 카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고 나면 더 이상 보기 전 마음이 아니게끔 만들어 주는 영화가 있다. 밀가루처럼 흩날리는 마음을 부풀어 오른 빵으로 만들어 주는 영화가 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 마음을 빵으로 만들어 준 영화, ‘퍼스트 카우’에 대해 생각하겠다. ‘퍼스트 카우’는 한 편의 서부 영화이기 이전에,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화다.

왼쪽에서부터 천천히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선박으로 시작되는 영화 ‘퍼스트 카우’의 도입부는 관객들이 인내하며 지긋이 지켜보게 만든다. 사진 출처 더필름익스피어리언스
영화가 시작되면 강과 대지와 하늘이 수평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왼편에서 거대한 선박 한 척이 등장한다. 마치 신대륙 아메리카에 낯선 문명이 밀려오는 것처럼, 배는 강과 대지와 하늘 속으로 육중하게 밀고 들어온다. 그 육중한 배는 아주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카메라는 미동도 없이 그 배의 느린 움직임을 응시한다. 관객은 그 배가 화면의 중앙에 올 때까지 인내하며 그 장면을 지긋이 지켜보아야 한다. 도대체 왜 이 장면을 이 정도나 오래 보여 주는 거지? 이렇게 자문할 때야 비로소 이 난데없는 도입부 장면은 끝난다.

영화에서 한 소년은 두 남자의 유골을 발견한다. 현란하거나 거창할 게 없는 전개 속에서 유골의 발견은 섬뜩하기보다는 일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진 출처 IMDb
배가 지나간 그 강가에서 한 소년이 두 남자의 유골을 발견한다. 도대체 누가 죽은 것일까. 이제 관객은 죽음을 생각하며 영화를 보아야 한다.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은 어쩌면 대수롭지 않다. 서부 개척기에, 날품팔이 노동자 두 사람이 생존을 도모하다가 고생 끝에 결국 죽고 만다는 이야기다. ‘야만적인(?)’ 신대륙에 진주한 영국 수비대장은 런던에서 먹던 우유가 그리워 소를 반입한다. 날품팔이 킹 루와 쿠키는 수비대장이 키우는 소의 젖을 몰래 짜서 케이크를 만들어 판다. 그러다가 발각되어 쫓기던 끝에 결국 숲속에서 죽는다. 여기에 현란하고 거창한 드라마 같은 건 없다.

개척 시기에 있었을 법한, 그러나 너무 소소하여 기존 서부 영화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어떤 죽음, 이 영화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을 것 같은 사회적 약자의 쓸쓸한 죽음.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서 서부 개척기의 잔혹함이나 미국 문명의 더러움이나 초기 산업자본주의 폐해 운운하고 마는 것만큼 맥 빠지는 일이 또 있을까. 이 영화에서 그런 정치적 메시지를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어렵지 않은 만큼이나 진부하다.

영화가 마무리되면 ‘퍼스트 카우’를 피터 허턴에게 헌정한다는 자막이 뜬다. 피터 허턴은 이른바 ‘느린 영화’를 천착해 온 실험 영화 감독이다.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은 거의 정지화면과도 같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소리가 소거되어 묵상하는 듯한, 그러나 뭔가 절망적인 일상의 풍경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피터 허턴의 영화 세계다. 2016년 피터 허턴이 암으로 사망하자,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추모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터는 우리 눈앞의 일상을 더 깊게 보게 해주었다고. 현란한 이미지의 향연으로부터 피난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그에게 영화란 거창한 관념의 일이라기보다는 보는 눈을 훈련하는 일이었다고. 그러니 켈리 라이카트가 피터 허턴에게 애써 헌정한 이 영화를 조야한 정치 비평으로 환원해버리는 일은 보는 눈을 퇴화시키는 일이나 다름없다.

피터 허턴 영화를 연상시키는 ‘퍼스트 카우’의 도입부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 구호나 표어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고통스럽지만 때로 아름답기도 한 광경을 천천히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아 달라는 요청이다.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말을 하려는 시도는 답이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구체적인 인물과 상황을 경유하지 않고 메마르고 일반적인 정치 비평을 반복해대는 것 역시 그만큼 답이 없다.

사태의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천히 보아야 한다. 천천히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본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음미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주인공 쿠키가 소젖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짜고 있는지, 케이크 레시피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소의 큰 눈과 주인공의 슬픈 눈이 얼마나 닮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들은 모두 삶의 전장에서 젖을 짜이고 있는 순한 동물들이었다.

주인공 쿠키는 날품팔이였지만, 날품팔이에 불과했던 사람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향기로운 케이크를 굽고자 했던 사람이며, 그러기 위해 밤에 소젖을 짜고 싶었던 사람이며, 그것도 가능한 한 다정하게 짜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날품팔이 행인 A의 죽음이 아니다. 언젠가 베이커리를 열겠다는 달콤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구체적인 사람의 죽음이다. 이 생생한 사실을 지긋이 음미하지 않으면, 아무리 영화를 보아도 마음은 밀가루처럼 흩날리기만 할 뿐 빵처럼 부풀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내어 피터 허턴이나 켈리 라이카트의 잔잔한 영화를 보는 일은 현란한 이미지의 야단법석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다. 끝없이 독촉해대는 생활의 속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구체성을 무시한 난폭한 일반화에 저항하는 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란한 연말의 시간을 통과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은 신산한 삶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레시피이기도 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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