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가 필요하다[동아광장/김금희]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입력 2021-10-13 03:00수정 2021-10-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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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름 덕에 바뀐 일상
나이 들어도 또 다른 별칭 필요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지난여름부터 영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큰맘 먹고 끊었던 화상 영어강의를 두어 번 접속해 보는 것으로 완전히 ‘날리고’ 난 뒤였다. 뭔가를 다시 배우는 것도 낯선데, 그걸 전화와 인터넷으로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개받은 강사에게 연락해 첫 수업을 잡았고 그는 영어 이름을 지어 오라고 안내했다. 며칠간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기 위해 애썼다. 대학 때 만든 영어 이름이 있었지만 필수 과목을 위한 것이고 지금은 제 발로 공부하러 가는 것이니까 특별한 이름이 필요했다. 나 스스로 이 일을 성의 있고 특별하게 대하고 싶었다.

요즘 내가 자주 듣는 호칭은 대체로 존칭이다. 작가님이나 선생님, 교수님, 때론 심사위원님. 사회생활 기간이 늘고, 나를 무람없이 대해줄 사적 관계보다 일과 관련해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가 잦아져 더 그렇다. 이처럼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어느덧 이름 뒤에 붙어버린 어떤 무게. 다시 무언가를 배우는 학생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은 그런 부담을 덜어내겠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말을 새로 배우는 일만큼 혁신적인 방법은 없을 터였다. 말은 사고와 감정 그리고 행동까지 좌우하니까.

인터넷에서 영어 이름을 검색해 많은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나름 후보에 넣었던 이름들은 반세기 전 유행했던 영어 이름이라는 사실에 포기하고, 소설 속 주인공이나 소설가의 이름을 따서 지을까 하는 대안은 그들이야말로 대체로 불운한 삶을 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 또 지웠다. 요즘 엄마들이 선호하는 아기 이름으로 할까도 싶었지만 듣기만 해도 감각적이고 중성적 매력이 있는 그 이름들은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나는 우연히 발코니로 시선을 돌렸고, 여름이 오자마자 샀던 데이지 화분을 바라보다가 그냥 그 여름 꽃의 이름으로 결정했다. 데이지, 이제 그것이 나의 부캐, 요즘 말로 하면 일상 속 내 새로운 캐릭터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 공부는 생각보다 즐겁고 또한 생각보다 어렵다. ‘데이지’가 되어 책상 앞에 앉으면 평소 당연하게 선택되던 풍부한 표현과 사려 깊은 단어 선택은 온데간데없고 정보의 습득과 전달이라는 1차원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마치 아이가 세상을 알기 위해 반복해서 묻고, 열의 있게 묻고, ‘왜요’라고 묻지 말랬지(!)라는 어른들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사력을 다해 묻는 것처럼. 물론 입을 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당연하게도 나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대학을 졸업한 어른이고 데이지이기 이전에 작가님, 선생님, 심지어 교수님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이처럼 무구하게 뭔가를 배워나가는 힘으로 충만했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 무엇이든 배우고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런 충동과 에너지를 누르거나 외면하는 편을 택했고 그 결과 이렇게 고정되고 한편으로 안정된 상태가 됐다. 어쩌면 그건 어떤 수치심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좀 못하거나 서툰 모습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 내면화된 수치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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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업 날, 영어 강사는 나에게 나이를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하다가 한국 나이가 아닌 만 나이로 대답했다. “그러면 원숭이띠인가요?” 강사는 자신과 동갑이라며 반가워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보다 한 살 많은 양띠였다. “영어 대화이니까 영어식으로 만 나이를 말씀드린 거예요.”

나는 구구절절하게 변명했고 강사는 내 마음을 바로 간파했다. 그리고 내가 학원에서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학생일 뿐이라는 다정한 위로와 함께, 일단 입을 열고 실수투성이의 문장이라도 한마디 하려는 시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보다는 언제나 가치 있다고 말해주었다. 수업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꾸 틀리는 사람이 아니라 틀릴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해서 시작된 ‘데이지’라는 내 인생의 두 번째 이름은 적어도 이 가을까지는 열심히 자기 몫을 하고 있다. 과제를 내주던 사람에서 숙제를 하는 사람으로, 아는 것을 전해주던 사람에서 모르는 것을 깨닫는 사람으로, 답변하던 사람에서 질문하는 사람으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얼마 전 친구와 동네 카페에 갔을 때 적립카드를 만들면 포인트를 쌓아준다는 사장의 권유를 받고 응했다. 사장은 우선 내 전화번호를 확인했고 “별칭도 되는데 이름은 어떻게 저장할까요?”라고 이어서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좀 생각하다가 “데이지”라고 대답했다. 이래서 이름 하나가 더 필요하구나, 라고 혼자 괜히 뿌듯해하면서, 여기서 더 나이가 들어도 언제든 또 다른 ‘부캐’는 필요해지겠구나 예상하면서.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부캐#두 번째 이름#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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