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의 추억[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209>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 입력 2021-09-08 03:00수정 2021-09-0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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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시인’이라고 불리는 시인이 있다. ‘훼손된 세상을 찬미하려고 노력하세요’라는 시로 지난 20년 동안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아담 자가예프스키가 그 시인이다. 그런데 그는 미국인이 아니라 폴란드 시인이다. 그 시도 9·11이 일어나기 1년 반 전에 쓰인 것이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리보프를 방문한 경험을 형상화한 시다.

리보프는 이전에는 폴란드 영토였다. 그런데 폴란드는 1945년에 있었던 얄타회담의 결과로 그곳을 우크라이나에 내주고 패전국 독일의 영토 일부를 보상으로 받아야 했다. 시인의 가족을 포함한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내쫓겨 실향민이 되었다. 고향은 이제 남의 나라 땅이었다. 엄청난 상처였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와 함께 50여 년 만에 찾은 고향 집은 쐐기풀이 웃자라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시인의 눈에 비친 고향은 아름다웠고 햇볕은 따스했다. 그의 시가 “훼손된 세상을 찬미하려고 노력하세요”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유다. 그런데 망가지고 부서지고 훼손된 세계를 어떻게 찬미할 수 있는가. 그는 아름다운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자고 말한다. 풍요로운 대지와 한가로운 여름날, 음악이 화려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던 빛나는 순간들, 가을에 공원에서 도토리를 줍던 일. 그러한 기억들이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거다. 폐허 속에서도.

미국인들은 9·11테러를 겪고 절망스러워했다. 그들의 무릎이 꺾이고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러한 그들에게 시인의 따뜻한 말은 위로가 되었다. “부드러운 빛은 길을 잃고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그들을 위로한 것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한 정치인들의 말이 아니라 훼손된 것들을 애도하는, ‘폐허의 시인’이라 불리는 이방인 시인의 따뜻한 눈이었다. “당신은 훼손된 세상을 찬미해야 합니다.” 아무 관련이 없어도 그가 9·11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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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
#9·11 시인#아담 자가예프스키#도토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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