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슈퍼맨보다 슈퍼다[이승재의 무비홀릭]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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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가장 더러운 흙에서 가장 순결한 꽃이 필 수 있을까. CGV아트하우스 제공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가장 더러운 흙에서 가장 순결한 꽃이 필 수 있을까. CGV아트하우스 제공
[1] 깜짝 놀랐어요. 북한 민간인이 ‘머구리 잠수복’을 입고 겨울바다를 6시간 헤엄쳐 강원 고성군 해안을 통해 귀순했다는 소식을 듣고요. 이건 민간인이 아니라 초인이 아닐까 말이지요. 하긴 북한 사람들은, 주식 투자에 눈이 멀어 스마트폰만 주구장창 쳐다보는 남한의 약삭빠르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민간인들과는 체질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지난해에는 북한 체조선수 출신이 최전방 3m 높이 철책 기둥을 가뿐히 짚고 뛰어넘어 귀순한 사례도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가서 분단 300년쯤 지나면 남북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진 않을까요? 남한 사람들은 머리만 호박처럼 커지는 쪽으로, 북한 사람들은 머리는 당구공처럼 작아지고 몸이 철인처럼 다부져지는 방향으로 말이에요. 그래서 머리 큰 남한 남자와 체력 끝내주는 북한 여자의 유전자를 결합해 굉장한 두뇌 능력에 더 굉장한 신체 능력을 겸비한 이른바 ‘슈퍼울트라 통일맨(Super Ultra-Reunion Man)’이라는, 우성 유전자로 똘똘 뭉친 신인류가 탄생하진 않을까 하는 ‘병맛’ 나는 상상도 해보아요.

최전방 2중 철책을 뛰어넘은 북한 사람의 능력을 믿지 못하겠다고요? 상상력 넘치는 한국 영화에선 이미 이런 특별한 사람을 소재로 다룬 적이 있어요. 전재홍 감독의 ‘풍산개’(2011년)란 영화엔 ‘산’(윤계상)이라고 하는 청년이 나와요. 말을 못 하는 이 청년은 ‘알바천국’에도 없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요. 남과 북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비무장지대를 껌 씹듯 오가면서 이산가족 사이에 소식과 돈과 물품을 전해주지요. 서울에서 평양까지 3시간에 주파한다는 이 청년이 어떻게 휴전선을 통과하느냐고요? 장대를 써서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휙 철창을 뛰어넘는답니다. 하지만 영화의 이런 상상력은 외려 현실 속 북한 주민들의 놀라운 능력치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슈퍼파워는 벼랑 끝에 선 절박한 인간에게 신이 내리는 찰나의 선물이니까요. 이렇게 가다간 머구리 잠수복을 입고 북한 옥류관 냉면을 남한으로, 남한의 오븐치킨을 북한으로 헤엄쳐 배달하는 슈퍼해녀를 다룬 영화까지 나올 기세예요.

[2] 맞아요. 클립톤 행성에서 온 외계인 왕자 슈퍼맨과 신화 속 세계의 공주 출신인 원더우먼은 진정한 슈퍼히어로가 아니에요. 부모 잘 만나고 유전적으로 뛰어난 선택받은 소수일 뿐이지요. 진짜 슈퍼히어로는 결핍과 번뇌를 딛고 스스로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존재예요. 예를 들어 김래원 주연의 TV 드라마 ‘루카: 더 비기닝’ 속 주인공 ‘지오’처럼요. 제목부터 있어 보이는 이 드라마 속 지오는 미친 과학자가 우성 유전자들을 편집해 만든 최고 생명체예요. 전기뱀장어처럼 몸에서 고압전기가 뿜어 나오죠. 하지만 지오는 특별한 능력을 저주로 여겨요. 가까운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제어되지 않는 힘이니까요. 다행히도 암컷 전기뱀장어가 아닌 ‘여자 사람’을 사랑하는 성향을 지닌 지오는 사랑스럽고 터프한 여인 ‘구름이’를 만나면서 남다른 힘을 신의 축복으로 바꿔놓아요. 신의 섭리를 거스르려는 나쁜 놈들을 혼내주는 데 슈퍼파워를 제대로 사용하니까요.

나의 존재는 신의 저주일까 축복일까. 지오의 고민은 영화 ‘엑스맨’에서 익숙하게 마주해 온 질문이에요. 엑스맨의 리더이자 구레나룻이 장난 아닌 ‘야생남’ 울버린은 어떤 상처에도 몸이 복원되면서 영원히 사는 ‘힐링 팩터’ 능력을 가졌어요. 진시황도 갈구한 영생 능력이지만 울버린은 고민이에요. 죽지 않는다는 건 인간 고유의 고통을 바윗돌처럼 짊어진 채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영겁의 세월을 직면해야 하는 신의 형벌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울버린을 능가하는 진짜 슈퍼영웅은 울버린을 연기한 호주 출신 배우 휴 잭맨(52)이라고 생각해요. 1996년에 13세 연상의 여인과 결혼한 그는 결혼 25년 차인 올해 초 아내와 해변을 걷다 뜨겁게 키스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으니까요. 여성들에게 인기 끝판왕인 데다 매너도 끝내주는 미남 배우가 강산이 두 번 반 바뀌는 25년 동안 바람 안 피우고 65세 아내와 여전히 끈적한 키스를 나누는 능력 자체가 슈퍼파워가 아닐까 말이에요.

[3] 이런 뜻에서 저는 ‘스캔들’을 만든 이재용 감독의 2016년 개봉 독립영화 ‘죽여주는 여자(The Bacchus Lady)’에서 진정한 슈퍼영웅을 목도했어요. 주인공인 소영(윤여정)은 탑골공원에서 남자 노인들에게 자양강장제를 팔며 매춘을 하는 이른바 ‘○○○(자양강장제) 아줌마’예요. 동두천 기지촌 출신인 그녀는 동종 업계에서 차별화된 서비스를 선보이며 노인들 사이에 ‘죽여주는 여자’로 통해요. 흑인 미군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갓난아기 때 미국으로 입양 보낸 것이 천추의 한인 그녀는 따스하고 사랑이 많아요. 오갈 데 없는 혼혈아를 먹이고 입히며 아들처럼 손자처럼 돌보지요. 결국 그녀는 독거노인들의 안락사를 도우면서 진짜로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요. 분명 불법적인 행동이지만 죽음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벼랑 끝 노인들의 고통을 끝내주는 일을 자신의 죄에 화답하는 업(業)으로 받아들이지요. 경찰에 붙잡힌 그녀는 감방에서 쓸쓸히 죽어요.

더러운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고통받는 타인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 스스로를 신의 제단에 내어놓는 그녀야말로, 죄책감의 진흙 위로 구원의 꽃을 피워낸 진짜 슈퍼히어로가 아닐까요? 인간이 슈퍼맨보다 ‘슈퍼’입니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인간#슈퍼맨#죽여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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