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불꽃을 알아?[이승재의 무비홀릭]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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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소울’의 한 장면. 인생의 불꽃을 찾아라. 근데 불꽃을 찾고 나면 뭐가 또 있지?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애니메이션 ‘소울’의 한 장면. 인생의 불꽃을 찾아라. 근데 불꽃을 찾고 나면 뭐가 또 있지?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 이 글에는 영화 ‘소울’에 관한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 후 읽어주세요.

서울 강남에서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여고생과 엄마가 머리도 식힐 겸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소울(Soul)’을 지난 주말에 보았다. 관람 후 스타벅스로 간 딸과 엄마는 각각 유자민트티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호두당근 조각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마스크를 쓴 채 다정하고 살벌한 대화를 나누었다.

딸은 본 영화 시작 전 상영된 단편애니메이션 ‘토끼굴(Burrow)’에 대한 말부터 꺼냈다. 토끼 한 마리가 제 집을 마련하려 굴을 판다. 막상 땅을 파고 들어가니 절망이다. 이미 두더지, 들쥐, 뱀, 도롱뇽, 곰 등이 제 보금자리들을 마련하고 있어 요만큼의 자투리 공간도 남지 않은 것. 열 받은 토끼가 더욱 미친 듯이 이곳저곳을 파헤치다 결국 수맥을 건드려 땅속은 난장판이 된다. 혼비백산해 땅 위로 도망쳐 나온 동물들은 힘을 합쳐 땅속에 모두의 마을을 재건한다는 아름답기 짝이 없는 스토리다.

=토끼는 ‘개인주의자’에 대한 은유야. 자기만의 집을 짓겠다는 이기심과 탐욕만 없었다면 애당초 땅속 마을은 평화로웠을 테니까.

엄마=엄만 오히려 한국 부동산 문제의 현실을 보았단다.

=또 뭔 말이야?

엄마=아파트는 한정되어 있는데 너도나도 똘똘한 한 채를 가지려니까 집값이 폭등하잖니? 땅속 마을은 재건축이 금지된 강남 아파트, 토끼굴은 ‘똘똘한 한 채’ 마련을 위한 욕망이라고 생각해. 결국 땅속 사회가 무너지고, 동물들은 협력해 새로운 마을을 만들잖아?

=해피엔딩이지.

엄마=아니야. 그건 사유재산이 사라지고 폐허가 된 땅에 100% 공공재건축·재개발이 된다는 얘기지.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 무서운 세상이 되는 거야. 이런 사회에선 누구도 나만의 굴을 파기 위해 열심히 살려 하지 않게 되지. 경쟁심이 사라지면서 모두가 사이좋게 못사는 사회주의가 되는 거야.

=꼴보수.

엄마의 예술적인 해석에 혀를 내두른 딸은 얼른 ‘소울’로 화제를 돌렸다. 미국 뉴욕 중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는 ‘조’의 진짜 꿈은 재즈클럽에서 전설적인 밴드와 함께 연주하며 사는 자유로운 뮤지션이 되는 것. 그만 맨홀에 추락해 숨진 조는 ‘태어나기 전 세상(Great Before)’으로 가고, “누구나 자신만의 불꽃(Spark), 즉 삶의 목표와 꿈을 가져야만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미션에 맞닥뜨린다. 우여곡절 끝에 환생한 조는 몽매에도 그리던 재즈클럽에서의 연주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무슨 기분이지? 꿈을 이루었지만 공허함은 채워지질 않는다. 조는 인생의 목적(purpose)을 넘어, 발등을 간질이는 파도의 감촉, 페퍼로니 피자를 한입 베어 물 때의 짜릿한 미각, 손안에 떨어져 안기는 낙엽처럼 삶의 순간순간을 호흡하는 일이 진짜 인생임을 깨닫는다.

=“누구나 자신만의 불꽃을 찾아라”라는 대사를 내 인생의 대사로 삼을래. 나도 세계와 소통하는 아티스트가 되겠다는 ‘불꽃’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특히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자기만의 불꽃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말은 너무 멋져.

엄마=“모든 사람이 강남에 살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강남에 살려고 노력해야 인서울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처럼 엄마는 들려.

=됐고.

엄마=엄마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야. 보통 애니메이션들은 주인공이 그토록 염원하던 꿈을 실현하면서 아름답게 끝나지 않니? 근데 이 영화는 꿈을 이룬 주인공이지만 인생엔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알려주는 결말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거야.

=맞아. 최고의 야구선수, 최고의 연예인, 최고의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어 꿈을 이루고 억만금을 벌더라도 인생의 작지만 소중한 순간들을 느끼지 못한다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거지. 인생에선 꿈, 비전, 목적, 목표 같은 ‘불꽃’보다는 ‘그저 사는 것(regular living)’의 의미와 가치가 중요하다는 철학적인 메시지야. 대입 면접에서도 답변으로 써먹을 만한 요긴한 시각이 아닐 수 없네. 아, 멋진 대사야. I‘m going to live every minute. 난 매순간을 살아갈 거야!

엄마=“꿈을 이루고 나면, 그다음엔 뭐가 있지?”라는 말이 멋져 보이지? 다 네가 어려서 그런 거야. 꿈을 이루지 못하는 루저들이 자기를 합리화할 때 단골로 쓰는 말이 “인생엔 꿈 이상의 것이 있다”거나 “작지만 소중한 것”과 같은 궤변들이야. 반대로 생각해 보렴.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못 이루어야만 인생의 의미를 찾는 거야? ‘작지만 소중한 것’보다 소중한 건 ‘크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실업자가 되어서 뺨을 스쳐지나가는 겨울바람을 뼈로 느끼며 벤치에 누워 있는 게 진짜 자유로운 영혼이니? 서울대 가. 그다음에 인생의 의미든 뭐든 찾아.

=엄마도 서울대 못 갔으면서.

엄마=엄마 인생의 불꽃은 너다.

=헐.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불꽃#소울#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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