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정말 술 주고 설탕 받자 했다면[오늘과 내일/신석호]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입력 2020-08-14 03:00수정 2020-08-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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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물물교환 응대는 대북제재 효과 증거
버티기 돕기보다 핵 포기 지렛대로 삼아야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세 번째 평양 방문 때인 2003년 3월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고위 관계자가 “인민들이 쓸 약이 필요하다”며 일장 연설을 했다. 좀 도와 달라는 취지였지만 그 속에는 북한 물건이 왜 질이 떨어지는지, 그것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 경제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솔직한 고백이 담겨 있었다. “과거 사회주의 나라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우리가 땅콩을 집어주면 그쪽에서 페니실린을 주었습니다. 모든 게 우호적이었고 그래서 상품의 질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래서 우리가 좀 게을러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나라들이 우리를 배신하고 자본주의 체제로 가버리자….”

2007년 쿠바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바나대 박사 출신인 호세 아리오사 씨의 회고. “소련과 물물교환을 할 때가 쿠바 사회주의의 황금기였습니다. 쿠바는 소련이 주는 원유로 비싼 차를 굴렸고 남은 것을 국제시장에 팔기도 했어요. 우린 설탕만 공급하면 그만이었지요. 그 결과 쿠바는 설탕이나 럼주, 담배 정도만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사라지자….”

우호무역과 청산결제가 가져온 모럴해저드는 북한과 쿠바 경제가 지금도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다. 냉전 시절 사회주의 맹주였던 소련은 두 나라를 정치적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말 그대로 ‘퍼주기’를 했다. 질 낮은 땅콩이나 설탕과 고가의 원유를 비등가적으로 맞바꾸는 우호적 물물거래와 청산결제는 북한과 쿠바를 타락시켰다. 1992년 소련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했을 때, 북한과 쿠바는 아무런 능력 없이 시장으로 내던져졌다.

이름도 생소한 민간단체가 북한의 술과 남한의 설탕을 물물교환하는 계약을 맺었고 통일부가 승인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선 불편했다. 그동안 북한 지도부는 도대체 뭘 한 거지? 쿠바도 1990년대 초반 ‘특별한 시기’라는 혹독한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30년 동안의 개혁과 개방을 통해 조금은 살 만한데. 인민들 먹여 살리는 것보다 세습독재 체제의 대를 잇느라 바빴던 북한은 이제 그 옛날 물물교환을 다시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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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그 소식이 궁금한 이유는 과연 김정은이 계약 내용을 알고 사인했을까 하는 것이다. 김정은은 핵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남북한 경제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접근법을 피력해 왔다. ‘옛날처럼 구걸하는 듯한 인도적 지원은 받지 않겠다. 핵국가 북한에 걸맞은 대규모 경협계획을 그려 와라.’ 근데 겨우 1억5000만 원(약 12만6000달러) 상당의 물물교환에 사인을 했다고? 그것도 술 주고 설탕 받는? 김정은은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 나갔다가 망신을 당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라며 남한 것은 일절 아무것도 받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한기범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만일 김정은이 이를 알고서도 사인했다면 경제 사정이 정말 심각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남한이 주는 설탕 167t이라도 받아 평양 특권층 아이들 단과자라도 만들어 돌려야 충성심이 유지될 정도라는 것밖에 안 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2016년 이후 핵능력 강화 국면에서 국제사회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북제재가 드디어 효과를 발휘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통일부 내에는 북한학자도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물물교환이 유엔의 제재 대상인지를 떠나 제재의 정신을 생각하면 답은 뻔하다. 핵 들고 버티겠다는 의도가 뻔한데 버티도록 도와주는 게 답인가? 술 받고 설탕 주어서 과거 소련처럼 북한을 컨트롤할 수 있나? 막 부임한 장관은 당장 보여줄 게 필요하겠지만 좀 더 시간을 끌면서 ‘핵을 포기하면 설탕보다 더 큰 것을 줄 수 있다’고 설득하라. 길게 보면 그게 답이지 않나.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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