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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포로로 평생 강제노역… 죽어서도 이름 숨기는 ‘43호’ 낙인[논설위원 현장칼럼]

입력 2020-07-22 03:00업데이트 2020-07-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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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상대, 첫 배상판결 받아낸 국군포로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한모 씨(오른쪽)가 10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물망초 사무실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한 씨는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의 불이익을 우려해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물망초의 박선영 이사장(왼쪽)과 정수한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위원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구자룡 논설위원
14일 오후 9시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한 중소병원 장례식장 2호실. 조문객이 많지 않고 조화 화환도 2개만 놓여 있어 쓸쓸했다. 영정 앞에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명의로 보내온 검은색 조기(弔旗)가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국군포로로 52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15년 전 탈북한 이모 씨(90). 그의 별세로 1994년 조창호 소위 이후 탈북 귀환한 국군포로 80명 중 생존자는 22명만이 남게 됐다. 이 씨는 살아서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유족은 부고도 내지 않았다. 북에 두고 온 부인과 두 딸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6·25전쟁에 목숨을 걸고 참전했다 붙잡혀 수십 년간 북한 땅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사선(死線)을 넘어온 탈북 국군포로 대부분은 아직도 죽어서도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金씨 일가’에 법적 책임을 묻다

서울중앙지법은 7일 탈북 국군포로 노모 씨(91)와 한모 씨(86)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번 소송을 도운 탈북민 인권단체 ‘물망초’의 박선영 이사장(동국대 교수)은 “북한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명령을 내린 최초의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해 3명, 올해 들어서도 2명째 고령의 국군포로가 세상을 떠났다. 유엔사 자료 등에 따르면 정전협정 후 공산군에 붙잡힌 국군포로 중 8343명만이 인도되고 8만여 명은 북한에 억류됐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수용소를 거쳐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생존자는 2014년 560여 명이 가장 최근에 파악된 숫자다.

국군포로에 대한 첫 배상 판결에 통일부 대변인은 “판결을 존중한다”면서도 “다른 사례에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을 다른 국군포로는 물론이고 납북 피해자, 천안함 폭침, 박왕자 씨 피격 사건 등 북한의 불법 행위로 피해를 입은 국민이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시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기대와는 많은 시각차가 있다.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정수한 위원장(울산대 교수)은 “국군포로의 한과 눈물을 달래기에는 배상금이 턱없이 작은 액수지만 북한의 강제노동 책임을 확인한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다”

배상 판결이 나온 사흘 뒤 서울 서초구 방배동 물망초 사무실에서 소송을 낸 한 씨를 만났다. 한 씨는 “북한에 얼마나 더 생존해 있는지 모르는 국군포로의 귀환을 위해 정부가 더 노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한 씨는 “북에 있는 국군포로 중에는 죽어서라도 남한의 고향 땅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북한은 국군포로들을 억류한 뒤 ‘내무성 건설대’를 조직해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국군포로로 강제노역 건설대가 조직됐다는 사실은 2000년 7월 탈북한 유영복 씨의 증언과 수기집 ‘운명의 두 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건설대는 1701∼1709부대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지역과 탄광에 분산돼 강제노역을 했다. 한 씨도 ‘1709부대’ 소속으로 여러 탄광을 전전했다고 한다.

한 씨는 실명과 얼굴 노출은 안 된다며 인터뷰를 진행한 3시간여 동안 줄곧 ‘국가유공자’가 앞에 새겨진 모자를 눌러썼다. 북한에서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는데 탈북할 때 다른 도시에 살고 있던 큰아들과 막내딸 등 2명은 같이 오지 못해 자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저항운동 ‘무궁화 청년단’ 사건

17세 중학생 때 마을 친구들과 함께 자원입대한 한 씨는 강원 양구의 7사단 수색소대에 배치됐다. 그가 입대한 1951년 말은 전선이 교착돼 수색소대는 최전선에서 일진일퇴를 벌이는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한 씨는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며 습격해 오는 중공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됐고 당시 이마에 입은 상처는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다.

한 씨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 평안북도 우시수용소에 있었다. 수용소의 한 관리자는 자신이 한국군 장교 출신으로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반란사건·1948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랑해 국군포로들이 속으로 분노했다고 한다. 한 씨는 수용소에 이어 함경북도 신창탄광 회령탄광 고건원탄광을 거쳐 하면탄광에서 61세가 되어서야 풀려났다. 40년 넘게 강제노역을 한 것이다.

한 씨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국군포로 출신들의 저항운동인 1958년 ‘무궁화 (장교) 청년단’ 사건도 증언했다. 청년단은 아오지탄광 출신을 주축으로 약 80명 규모였다. 그해 8월 발각돼 전원 사형될 때까지 1년여간 비밀리에 연락을 하며 활동했다고 한다.

살인적인 탄광 강제노동

한 씨는 고건원탄광은 갱도 내에 메탄가스가 많아 광원들이 쓰는 모자의 안전등 때문에 점화돼 폭발하는 사고가 많아 자신이 아는 사망자만도 15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가까이 지냈던 위생 군의관 출신 중위 강점출과 경북 안동 출신의 안종길 등 두 사람은 이름과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이 탄광에서 임금은커녕 안전장치도 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차별 속에 지낸 것은 몇몇 탈북 국군포로의 수기에도 나와 있다. 허재석 씨는 체험수기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2008년 출간)에서 “지하 4000m 탄광 막장에 들어가면 심장이 줄어들고 숨도 가빴다. 끝나면 집에서 땔 석탄을 메고 지하 경사도를 따라 2∼3시간을 걸어야 굴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는 “국군포로가 말실수로 잡혀가면 돌팔매로 사는 집 유리창을 모두 깨뜨리고 집을 허물어 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첫 탈북 귀환 국군포로인 조창호 소위는 수용소에서 탈주하려다 발각돼 13년형을 선고받았고 교화소와 탄광 노동 생활을 이어갔다. 이미 전사 처리돼 남측 가족들이 제사도 지냈던 그는 43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1980년 탄광에서 은퇴할 때 규폐증과 왼쪽 눈 실명, 작업 중 사고로 왼쪽 다리 절단 등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가족들도 외면한 ‘43호’ 낙인

북한에서 미송환 국군포로는 ‘43호’로 불린다. 북은 ‘내무성 건설대’로 편입된 이들에게 1956년 내각 명령 143호로 공민증을 발급했는데 ‘43호’는 명령번호를 줄인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결혼해 자녀를 낳으면 배우자와 자녀도 모두 ‘43호’가 된다는 것이다.

47년간 억류됐던 유영복 씨는 수기 ‘운명의 두 날’에서 ‘국군포로’라는 낙인 때문에 입양 자녀와 불편했던 사연도 소개했다. 아들도 ‘43호’ 신분이어서 중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고, 군에서도 받아주지 않자 자신을 입양한 유 씨를 원망했다고 했다.

2010년 1명이 돌아온 뒤 국군포로 탈북은 끊어졌지만 탈북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017년 1월 중국까지 넘어온 K 씨는 둥베이(東北) 지방에 체류하다 2월 초 북한 보위부 특수반에 납치돼 북송됐다. 당시 87세였다. 중국 현지의 한국 공관에서 “한 달 후 영사관에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기다리다 붙들린 것이다.

K 씨에 앞서 2005년 1월 중국까지 나왔다 다시 북송된 한만택 씨(당시 73세)도 어이없는 정부의 실수로 북송된 경우다. 한 씨의 가족들은 탈북 한 달여 전 한국 외교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그런데 엉뚱한 부서에 전달돼 탈북 이후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한 씨는 탈북 이튿날 옌지의 한 호텔에서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북송됐다. 그는 탈북 전 사망한 것으로 가장하기 위해 가묘(假墓)까지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국군포로 방치, 국가 의무 팽개친 것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라고 부른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정부는 국군포로를 이산가족의 일부로 분류해 협의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때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만나도록 했다. 정부는 국군포로가 북한에서 국경을 넘을 때는 직접 개입하지 않지만 북한을 벗어난 뒤에는 ‘재외 국민’ 구조 차원에서 나선다고 한다. 휴전협정상 명백히 ‘국군포로’이고 북한에 생존자가 숱하게 남아 있음이 많은 귀환 포로를 통해 확인됐는데도 송환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를 팽개친 것이다. 하물며 ‘국군포로’라는 말마저 북한의 눈치를 보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군포로는 탈북 귀환하면 현역병으로 제대 전역식을 치른다. 북에 있는 국군포로는 미귀환 ‘현역 국군 장병’이다. 지금까지 국군포로 수만 명이 북에서 차별과 강제노역 속에 스러져 갔다. 이번 배상 판결은 국가가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시간이 많지 않음을 다시 일깨워줬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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