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두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재국의 우당탕탕]〈35〉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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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얼마 전 어머니 기일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날 고향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날이라 형제들과 상의 끝에 모이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폭설 등 많은 자연재해가 있었지만 어머니 기일에 형제들이 모이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모이지 못한 아쉬움에서인지, 아니면 서로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우리 5형제는 그날, 서로 안부를 물으며 평소보다 길게 통화했다. 어쩌면 매년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습관처럼 모였다면 못 했을 이야기들인데, 그날 그 긴 안부전화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요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이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고 지역사회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불필요한 모임은 자제하고 외출도 자제하자는 분위기다. 그러다 보니 진짜뉴스인지 가짜뉴스인지 모르겠지만 부부가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중국발 뉴스도 접했다. 무슨 일이든 평소와 다르면 문제는 생기게 마련이다. 평소 안 하던 아침밥을 차려야 하고, 평소 안 하던 저녁 밥상에, 평소 안 하던 대화를 하다 보면 부부는 싸우게 마련이다. 특히 대화가 길어지면 늘 마음속에 숨겨둔 말을 꺼내고, 그건 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그런데 그동안 스마트폰이 가족을 조금씩 분리시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또 한 번 가족을 분리시킨 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 ‘톡’으로 대화를 하고, 같은 곳을 여행해도 서로 다른 사진을 올리며 서로 ‘좋아요’를 누르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분절된 시대에 사회적 거리 두기는 많은 걸 배우게 해줬다. 첫째, 자연의 회복이다. 모임도 자제하고 여행도 자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말에 혼자 운동을 하게 됐다. 혼자 남산에 올라가고 한강을 달리고 커피를 마시러 가고. 그런데 지난 주말 한강 달리기를 하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에 개나리가 만발해 있었고 늘 그 자리에 피어 있던 벚꽃도 예년과 다르게 더 활짝 피어 있었다. 예년 같으면 벚꽃을 꺾어가고 벚꽃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때문에 벚꽃도 지쳐 있었을 것 같은데 올해는 유난히 밝아 보였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 덕분에 자연이 살아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디 개나리, 목련, 벚꽃뿐이겠는가. 봄이 오면 자주 가던 동물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 덕분에 동물원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어 동물들도 난생처음 휴가를 즐기고 있을 것 같다.

둘째는 관계의 회복이다. 평소 서로 안 하던 대화를 하고, 평소에 없던 시간을 갖는다는 건 가족에게 휴가 같은 시간이다. 휴가를 가면 불만을 쌓아두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풀고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듯, 이번 사회적 거리 두기는 가족에게 주어진 강제 휴가다. 싸우라고 준 시간이 아니라 즐기라고 준 시간인데 대부분의 가족은 불편함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사회적 거리 두기 덕분에 배운 마지막 즐거움은 독서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책에 손이 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반가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학창 시절 즐겨 읽던 함민복 시인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시집이었다. 이 봄, 사회적 거리 두기가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들었지만, 그 사이에 반드시 꽃이 필 걸 믿는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코로나19#사회적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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