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블랙리스트 일부 파기환송, 직권남용죄 적용 보다 엄밀하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31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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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어제 박근혜 정부 때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등이 문화·예술계 특정 인사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도록 문화예술위원회 등에 압력을 행사한 혐의에 대해 ‘일부 직권남용죄의 적용이 엄밀하지 못하다’는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김 전 실장은 1심에서 징역 3년,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됐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무 권한의 남용으로 타인이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타인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대법원은 “행정기관의 의사 결정과 집행은 상호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게 통상적”이라며 “이런 관계에서 한 기관이 다른 기관의 요청을 청취하고 협조하는 행위를 법령상 의무없는 일로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이 지원을 배제하게 한 큰 틀의 행위는 직권남용이지만 그 과정에서 지원 배제 명단을 보내게 하고 심의 진행 과정을 보고하게 하는 부수적 행위는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은 최근 다른 사건 판결에서는 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KT 등에 특정인을 채용하라고 요구한 행위에 대해서는 사기업에 대한 채용 요구는 대통령 직무에 속하지 않아 아예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기초사실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경우는 공무원의 신분을 요하지 않는 더 일반적인 강요죄에 해당하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취지다. 또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이 성추행 문제를 제기한 서지현 검사를 인사 발령으로 불이익을 줬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정당한 인사권의 재량 범위에 속한다고 봐서 파기환송했다.

직권남용죄 고발 건이 매년 5000건 정도에서 2017년 이후 약 1만 건으로 크게 늘었다. 검찰이 국정농단과 적폐청산 수사에서 직권남용죄 기소를 남발한 것도 한 이유다. 법원의 하급심도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직권남용죄를 쉽게 인정한 측면이 있다. 공무원이 하는 일은 복잡 다양한 데다 재량의 여지도 있어서 무엇이 직권남용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과거에는 직권남용죄 기소가 거의 없어 대법원 판례가 많이 축적돼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봐도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공무원의 직권남용은 법치에 대한 중대한 위반으로 보고 단호히 처벌해야 하지만 직권남용죄를 너무 폭넓게 적용할 경우 정상적인 공무 수행을 방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칫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블랙리스트#직권남용죄#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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