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 핀란드 새 총리, 여성 아닌 청년 성공신화[광화문에서/우경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우경임 논설위원
우경임 논설위원
‘세계 최연소(34세) 여성 총리.’ 지난주 선출된 핀란드 산나 마린 신임 총리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그는 장관 19명 중 12명이 여성인 내각을 꾸렸다. 마린 총리와 교육 내무 재무부 등 30대 여성 장관이 나란히 선 사진을 본 순간, 영화 ‘겨울왕국 2’가 떠올랐다.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이다. 겨울왕국(=핀란드)에서 할아버지(=전임 총리)의 과오를 바로잡고 왕관을 받아든 엘사와 안나 자매(=여성 각료) 아닌가.

“당연한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유리천장을 깬 여성 총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환호에 대해 정작 핀란드는 ‘왜 저래’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이원집정부제를 택한 핀란드는 대통령은 선거로, 총리는 의회 투표로 뽑는다. 4월 국회의원 선거로 구성된 핀란드 의회는 의석수(200석)의 47%가 여성이다. 연립정부를 구성한 5개 정당 중 4개 정당 대표가 여성이다.

이런 의회에서 13년 동안 정치 경력을 탄탄히 쌓아 온 제1당(사회민주당)의 마린 부대표가 총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김수권 전 주핀란드 대사는 “여성보다는 청년이라는 점이 이례적”이라고 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적 성공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핀란드는 이미 여성 총리 2명, 여성 대통령 1명을 배출했다. 그런데 30대 총리는 통상 있던 일이 아니다.

핀란드는 뭐가 달랐나. 마린 총리는 이혼한 엄마가 동성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두 엄마 사이에서 자랐다. 그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시의원, 국회의원을 거쳐 총리에 올랐다. 그는 “복지국가에서 자란 나는 어려울 때 사회가 어떤 지지를 주었는지를 기억하고 감사한다”고 했다. 빈곤 청년 여성 동성 등 약자를 상징하는 그가 총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핀란드의 복지제도가 어떻게 사회 역동성에 기여하는지를 보여준다. 남다른 출신을 배척하기는커녕 다원화된 사회를 이끌 정치인으로 보는 포용적인 문화도 인상적이다. 김 전 대사는 “핀란드인은 그의 배경과 상관없이 적임자라는 실용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핀란드에는 청년할당제, 여성할당제가 없다. 그런데도 의회의 인적 구성이 다양하다. 핀란드 탐페레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서현수 서울대 분배정의연구센터 연구원은 “핀란드 정당 내 청년조직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마린 총리는 21세부터 사민당 청년조직에서 활동했고 실력을 검증받은 정치인”이라고 했다. 핀란드는 만 18세면 선거권은 물론 피선거권이 주어진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될 수 있다. 학제가 다르니 선거권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나라 피선거권은 대통령은 만 40세, 국회의원은 만 25세에 부여된다. 비례대표제도 역시 돈 없고 ‘빽’ 없는 청년의 정치 진입 문턱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핀란드도 사람 사는 곳인데 이상적인 시민만 살겠는가. 극우정당은 마린 총리의 등장으로 반(反)페미니즘, 블루칼라 지지가 확대될 것이라며 몰래 웃는다고 한다. 그가 이끌 연립정부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인구 550만 명의 작은 국가 시스템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할 수도 없다. 그래도 가난해진 청년세대를 줄기차게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는 우리 사회, 청년을 꽃 장식으로나 소비하는 우리 정치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마린은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핀란드#산나 마린 총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