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영]보기 거북한 홍 ‘후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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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사회부 차장
이동영 사회부 차장
홍준표 경남지사는 19일 아침 조간신문을 보며 흐뭇했을 것 같다. 여야 통틀어 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인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니 말이다. 여론은 ‘홍 지사가 야당 대표를 KO시켰다’고 보는 듯하다. 문 대표의 말문을 잘라가며 시종 거칠고 공격적인 발언으로 일관했다. 문 대표가 문제점을 지적하면 ‘대안을 갖고 오라’고 훈계했고 ‘나도 5000만 국민에게 무상급식하고 싶다’며 현실성 없는 반박을 내놨다. 경청한다는 느낌은커녕 멀리서 온 손님을 대하는 최소한의 배려도 찾을 수 없었다.

문 대표가 딱 부러진 논리나 정책을 들고 가지 못한 것도 문제이긴 하다. 어쨌든 평소 언행으로 볼 때 이런 수모를 당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법한 문 대표는 경남도청행을 강행했다. 야권에 표를 가져다 준 핵심 무기였던 무상급식이 치명상을 입는다고 판단해 서둘렀나 보다. 홍 지사는 이렇게 ‘비무장’으로 숨차게 달려온 문 대표를 홈그라운드에서 몰아붙여 35분 만에 백기 들고 나가게 만들었다. 여당 대표를 지낸 뒤 체급을 한참 낮춰 지방자치단체장이 된 홍 지사는 이 장면이 속 시원했을 게다. 하지만 나처럼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랬을지 궁금하다.

국회의원을 두 번 하고 지방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던 김문원 전 의정부시장은 당시 ‘나랏일 하다가 지방에서 시장 하니 갑갑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의도에서는 ‘야, 똑바로 해!’라고 고함치고 혼내면 척척 잘 돌아갔는데, 여기선 주민이 나한테 호통쳐. 원하는 대로 안 해주면 집까지 쫓아와 이름 부르고, 욕하고 혼내니까 너무 힘들어.”

맞는 말이다. 국회의원과 달리 정해진 구역 내 주민을 상대하는 자치단체장은 주민들 요구를 제대로, 빠르게 이행하지 않으면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예산이 얼마가 들어가든, 심지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홍 지사가 무상급식을 없애고 거기 들어갈 돈을 저소득층 교육비에 쏟아 부은 것은 상당한 모험이자 결단이라 평가할 만하다. 교육비 추가 혜택을 받는 경남지역 초중고교생이 10만 명이지만 아이들 점심값을 다시 내게 된 주민은 22만 명에 가깝다. 아무리 합리적 사고로 똘똘 뭉쳐 있어도 안 내던 돈을 내라고 하면 누구든 경남도지사실을 향해 눈을 흘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홍 지사는 큰 부담 없는 점심값을 내게 하고 대신 부자에겐 소액일지 몰라도 저소득층에겐 거금인 연 50만 원을 교육비로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예산을 퍼주기만 한다면 그런 도지사는 나뿐 아니라 누구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쪽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내 권력을 상대 당에 나눠주는 몇몇 도지사가 있는 걸 보면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는 생각도 든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게 틀림없다 해도 욕먹고 당장 내가 휘두를 칼자루가 짧아지는 길을 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홍 지사가 무상급식을 버리고 저소득층에 교육비를 지원하기로 한 것은 선출직이 인기를 버리고 미래를 선택한, 어려운 결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여기까지다. 도지사로서 올바른 방향을 잡았지만 그제 문 대표를 만난 자리에선 지사가 아니라 차기 대선을 노리는 홍 ‘후보’의 모습으로 등장한 탓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구보다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할 도지사가 그리 거친 표현으로 야당 대표를 면박했겠는가. 바른 방향으로 정책을 돌려놓고도 자신의 정치적 목표가 투영돼 그 의미를 희석시키는 건 곤란하다. ‘도지사 홍준표’로 뛰다 보면 국민이 대선 후보 타이틀을 붙여줄 테지만 스스로 칭해 봐야 정책 순수성만 의심받을 뿐이다.

이동영 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홍준표#경남지사#문재인#김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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