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88>은혜와 원수 맺음을 경계하였건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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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원수 맺음을 경계하였건만 ―송일순(1955∼)

찬바람 부는 강변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던 겨울밤
꽥! 꽥! 꺅! 꽥!
새가 괴이하게 울며
푸덕푸덕
강변 둔치로 날아들고 있었다
순간 큰 소리로
너 왜 그러니?
그러자
날아 앉던 새가
흠칫! 한다
그때
새의 앞발에 채어 비명을 질러대던
작은 새 한 마리가
수리부엉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어둔 창공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 간다
나 이제껏
은혜와 원수 맺음을 경계하여 왔건만!

요 작은 새도 여간 아니다. 수리부엉이한테 채인 순간 심장이 멎을 법도 하련만 비명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사력을 다해 푸덕거리고 버둥거렸을 테다. 그런다고 눈 하나 까딱할 수리부엉이가 아니다. 덩치로나 힘으로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곧 맛있게 잡수실 생각으로 포획물을 움킨 채 유유히 ‘강변 둔치로’ 날아 앉는 차, 웬 인간이 큰 소리를 지른다!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 ‘겨울밤’ ‘찬바람 부는 강변길’을 자기만의 시공간이라 여겼을 두 존재의 깜짝 부딪침. 그 덕분에 작은 새는 목숨을 구했지만 수리부엉이는 먹이를 놓쳤다. 수리부엉이는 투덜투덜 다시 먹잇감을 찾아다니겠지. 그에게 운이 또 따른다면 어느 운 나쁜 작은 동물이 그 작은 새 대신 세상을 뜨는 밤이 되겠지. 뜻하지 않게 동물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게 된 화자다.

‘나 이제껏/은혜와 원수 맺음을 경계하여 왔건만!’, 시의 말미에 화자는 슬며시 제 인생관을 비친다. 최선의 보신책(保身策)일 테다. 분란에 끼어들지 않고,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고, 이리 살면 적은 만들지 않을 테다. 이 반대로 살면 제 인생도 피곤하고 주위 사람 인생도 피곤하게 만들 테다. 따라서 좋은 말 듣기 쉽지 않을 테다. 어떻게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화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정치인이라면 정말 ‘별로’다. 정치인에게는 남의 인생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오지랖이 필요할 테다. 현실의 모든 일에 기꺼이 연루돼 생각과 계획을 갖고 그를 관철하려는, 즉 민생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려는 욕망을 가져야 할 테다. ‘욕심 없는 사람’ ‘사람 좋다’, 이런 말은 정치인에게 제 책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겠다.

황인숙 시인
#은혜와 원수 맺음을 경계하였건만#송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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