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열림과 낮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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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 들어갔더니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떡부터 내왔다. “웬 떡이냐?”고 물으니 딸이 대학에 합격해서 기쁨을 나누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3년 전쯤에 이 식당에서 점심 값을 계산하려는데 “오늘은 무료”라며 돈을 받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아, 그때요? 어머님과 함께 이 집에서 20년 동안 개성만두집을 운영했는데 그날이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49일이 되는 날이었어요. 그래서 그날 오신 모든 손님에게 무료로 만둣국을 대접했어요. 손님들께 감사하는 마음과 어머님이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딸이 대학에 합격했다면서 떡을 내놓은 것.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이웃과 함께 나누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넉넉한 인심이 떠오르면서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생각났다.

타인능해는 전남 구례에 있는 운조루의 쌀뒤주 마개에 새겨진 글자다. 아무나 열 수 있다는 의미로 운조루의 주인이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커다란 뒤주를 사랑채 옆 부엌에 놓아두고 끼니가 없는 마을 사람들이 쌀을 가져가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했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쌀을 퍼줄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슬그머니 퍼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배려는 운조루의 굴뚝에서도 드러난다. 부잣집에서 밥 짓는 연기를 펑펑 피우는 것이 미안해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뒤주는 열고 굴뚝은 낮춘 운조루는 6·25전쟁 때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지리산 자락에 있었지만 화를 당하지 않았으니 대대로 나눔을 실천했던 정신이 운조루를 지킨 셈이다.

요즘은 나와 내 자식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나눔보다는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고 기를 쓴다. 또한 내 돈 내 맘대로 펑펑 쓰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자손을 위해서라도 이웃에 덕을 베풀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 못지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함으로써 그 덕이 자손에게 미치도록 했던 것이다. 재산은 없어질 수 있어도 사람은 남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머님이 가시는 편안한 영면(永眠)의 길을 위하여, 딸이 앞으로 살아갈 창창한 미래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자 한 음식점 주인을 보면서 잊어버렸던 예전의 인심이 떠올라 흐뭇했다.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춥지 않다고 느낀 것은 뜨거운 만둣국을 먹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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