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한기흥]DJ의 햇볕, 박근혜의 대박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9일 03시 00분


한기흥 논설위원
한기흥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독일 드레스덴공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을 밝힌 뒤 북한이 보인 격렬한 거부 반응은 글로 옮기기 거북할 정도다. 14년 전인 2000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이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밝힌 대북 구상이 그해 6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던 것과는 판이하다.

북한은 왜 발끈하는 걸까. 노동신문이 1일 “사실 박근혜가 추구하는 ‘통일’은 우리의 존엄 높은 사상과 제도를 해치기 위한 반민족적인 ‘체제통일’”이라며 “그런 흉악한 속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통일구상’이니 뭐니 하고 떠들었으니…”라고 맹비난한 것이 그 이유일 듯하다.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을 흡수통일론으로 경계하는 것이다.

통일대박은 통일의 편익을 강조하는 데 방점(傍點)이 있다. 낙관적인 결론을 단순명료하게 전달해 듣는 사람은 통일이 되면 뭔가 수지맞는 일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떤 통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비용을 포함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박 대통령은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을 톱다운 방식으로 어젠다로 내세웠지만 세부계획은 ‘작업 중’이다. 우리 내부의 공론화를 거치지 않았고 북한과 사전 협의도 없었기 때문에 북한이 진의를 의심부터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남측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양보 또는 훼손하는 통일을 추구하지는 않을 테니 사실 통일대박은 북 정권엔 통일쪽박이 될 공산이 크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땠을까.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 ‘3단계 통일방안’을 일찌감치 주창했던 것과는 달리 베를린에선 “현 단계에서 우리의 당면 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라고 선언했다. “우리 경제는 북한을 떠안을 능력이 없다”는 현실인식에서였다. 북한이 두려워하는 흡수통일을 않겠다고 약속하고, 당국 차원의 경제협력이라는 선물을 내놓았으니 북으로선 옳다구나 했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박 대통령이 푼 민생 인프라 구축 등의 보따리는 북으로선 ‘그까짓 것’일 수도 있다.

베를린 선언 직전인 1999년의 남북 경제지표를 가장 최근 통계인 2012년과 비교해보자. 통계청에 따르면 외환위기에서 벗어나던 1999년 남한의 무역총액은 2634억 달러로 북한의 15억 달러보다 175.6배 많았다. 2012년엔 남한 1조675억 달러, 북한 68억 달러로 남한이 157배 많았지만 격차는 좁혀졌다. 쌀 생산량도 남한이 3.2배 많았던 게 2배로 줄었다. 반면 북한보다 14배 많았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8.7배로 좀 더 벌어졌다. 남한의 경제력이 여전히 우월하지만 통일을 감당할 수준은 아니다. 게다가 북한은 김대중 정부 땐 없던 핵무기 등 비대칭무기를 대거 확충해 놓고 군사모험을 서슴지 않아 평화통일의 여건이 결코 개선됐다곤 할 수 없다.

김 대통령은 통일에 관심이 많았지만 재임 중 서두르지 않았다. ‘퍼주기’ 비판 속에서도 남북교류협력 확대에만 주력했다. 자신을 ‘빨갱이’라고 여겼던 군 출신의 임동원을 설득해 ‘햇볕정책 전도사’ 역할을 맡겼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불안정성이 훨씬 커진 상황에서 통일의 비전을 제시했으나 구체적인 청사진은 없다. 무엇보다 만기친람(萬機親覽) 스타일인 박 대통령에겐 자신을 대신해 통일대박론을 설파할 핵심 참모가 없다.

북한이 지난달 30일 예고한 4차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도 낙진을 피하기 어렵다. 야심 차게 통일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켜도 들끓는 대북 제재 여론을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통일대박을 이루려면 예측불허의 북이 조성하는 지뢰밭 같은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할 준비부터 해야 한다. 공짜 대박은 없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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