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04>오래간만이다 52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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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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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이다 522번
―김영승(1958∼ )

오래간만이다 522번
이 겨울비 내리는 밤
나는 실내(室內)에서
밖의 너를 본다
비 맞는 마을버스를

오래간만이다 522번
우중(雨中) 마을버스는
비행기 같고

포장마차 같고
선술집 같고
선실(船室) 같다

17년 전에 처음 타봤지만
이번엔 정말 오래간만이다 522번
마을버스야

입김에
성에에
착하게만 흘러내리는
네온 간판
명성치과도 김재준 약국도 안녕?

나는
고공(高空) 비행기 객실 같은
실내에 앉아

몇 년 전
어느 벚꽃 만발한 날
벚꽃 사이를 뚫고 달리는 너에게
손짓을 한다

오래간만이다
나의 522번 마을버스야


멀리서 번호만 봐도 반가운 버스가 있다. 그 버스만 보면 우리 집 강아지나 고양이나, 친구를 보는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특히 종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동네 버스에 각별한 친근감을 느낀다.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면 그 버스는 추억의 버스가 된다. 화자에게 522번 마을버스가 그렇듯. 이제 522번 마을버스를 탈 필요가 없는 동네에서 사는 화자, 겨울비 흘러내리는 아파트 유리창 너머로 오랜만에 그 버스를 발견하고 반가움에 겹다. 그래서 옛 이웃을 만난 듯 마을버스에게 그 버스가 다니는 길, 눈에 삼삼 떠오르는 그 동네 풍경들의 안부를 묻는다. 시인의 어린이같이 무구한 마음이 따뜻하게 와 닿는 시다.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지하철도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는 동네를 위한 마을버스는 대개 소형 차량이다. 그 작은 몸체에 승객을 싣고 좁은 비탈길도 암팡지게 오르내리며 동네를 누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외국인이 많아서 마을버스에서 자주 그들을 본다. 동남아에서 온 듯한 청년들이나 아기를 안은 흑인 여인들이 익숙하게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게 어쩐지 신기하고 대견하고 애틋하다. 서울에서 서민으로 사는 모습을 이 빠진 데 없이 완성시키는 마을버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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