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는 지난해 재단법인 국립극단의 첫 번째 연극작품 ‘3월의 눈’을 연습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대본 읽기 단계에서 선생님은 이 삶과 죽음을 하나로 아우르는, 범상하지 않은 이야기를 완벽하게 소화하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막이 오르자 전석 매진과 함께 매회 기립박수가 쏟아져 나왔지요. 가슴을 울리는 것은 선생님의 실존 그 자체였습니다. 존재의 감동이랄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달관의 경지랄까. 그런데 제가 연출한 그 작품이 선생님의 유작이 되고 보니,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천생 배우셨습니다. 배우로서 선생님의 삶은 20세기 역사에서 다다를 수 있었던 고봉준령이었습니다. 그 산은 다가갈수록 더욱 더 우뚝해지는 산이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배우로 산다는 것은 선생님에게 도전한다는 의미를 띠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한국 배우사의 큰 획을 그으신 선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연극 배우들이 마주한 하나의 거대한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선생님이 살아오신 20세기 역사는 격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식민지와 광복, 그리고 전쟁으로 얼룩진 그 시간 안에서 선생님의 연기 인생은 고통과 환희로 무르익었고, 무대의 빈 공간에 홀로 서 있어도 ‘감격시대’였다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후학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선생님이 얼마나 정통 연기, 리얼리즘 연기를 추구하셨고, 체득하셨는지를 실제 몸으로 보여주셨다는 점입니다. 선생님은 연기의 기본과 정통이 없는 배우를 언제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네 차례나 주역을 맡았던 ‘파우스트’는 방황하던 후배 배우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배우로 살았던 분들 중에 선생님만큼 연기세계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신 분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연극의 현대적 해석에 누구보다 열려 계셨고, 실험적인 시도에도 긍정적이셨습니다. “정통이 없이는 실험도 불가능하다”는 지론은 선생님 연기 철학의 핵심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1962년 국립극단의 출범 이후 선생님은 국립극단과 반세기 운명을 같이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백성희 선생님과 더불어 국립극단을 가장 오래 지켜온 배우로 누구보다 탁월한 프로페셔널로 활동하셨습니다. 국립극단 단장도 두 차례나 역임하시면서 음으로 양으로 국립극단에 새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래서 ‘장민호=국립극단’이란 등식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가 됐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선생님과 함께 연극인들이 지켰던 연극의 거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술의 ‘미치광이’들이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던 모멘텀을 이제 우리 연극의 후배 세대들이 새롭게 개척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대학로, 명동 그리고 국립극단이 그 프런티어 정신을 이어받아 연극의 새로운 향기를 풍겨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후학들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은은하고 낙천적이면서도 관조적인 태도로 연기하시던 선생님을 대할 때면 늘 옷깃을 여미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믿었고, 실천해왔습니다. 그것이 오늘 연극의 살아있는 정신이며 연극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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