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컬링 대표팀 맏언니 신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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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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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한올 못닦아 동메달 놓쳤을땐 눈물이 핑 돌았죠”

5일 서울 태릉국제빙상장 내 컬링장에서 만난 신미성 선수. 그녀는 “웃음이 탤런트 전원주 같다고 해서 고쳐 보려 했는데 잘 안 된다”며 시종 하이톤으로 웃었다. 웃음소리가 여고생처럼 맑고 높았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5일 서울 태릉국제빙상장 내 컬링장에서 만난 신미성 선수. 그녀는 “웃음이 탤런트 전원주 같다고 해서 고쳐 보려 했는데 잘 안 된다”며 시종 하이톤으로 웃었다. 웃음소리가 여고생처럼 맑고 높았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너 컬링 해볼 생각 없냐?”

며루치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컬링이라면 파마?

최상희의 장편소설 ‘그냥 컬링’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으랏차’로 불리는 주인공 차을하의 머릿속 반사작용을 묘사한 대목이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컬링 한번 (인터뷰) 해 보면 어떨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자의 머릿속도 꼭 그랬다. ‘컬링이라면 파마?’

캐나다 레스브리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강 신화를 쓰며 ‘제2의 우생순’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만들어냈다는데…. 그래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우생순’ 같은 비인기 종목이 생각지도 못했던 성적으로 국위를 선양하면 언론은 남모를 죄책감에 시달린다. ‘더 관심을 보여줘야 했는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했는데….’ 그런데 컬링은 그런 죄책감마저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금시초문의 컬링’ 덕분에 나는 잠시나마 즐거웠고 행복했다. 정독도서관에서 ‘그냥 컬링’을 빌려보며 하루 종일 즐거웠고, 컬링 대표팀의 맏언니 신미성 선수(34)를 만나서는 ‘해피 바이러스’를 잔뜩 묻혀왔다.

▽기자=컬링이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됐어요.

▽신 선수=처음엔 멋모르고 했어요. 1998년 나가노 겨울올림픽 중계를 봤는데 신선한 운동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일본팀도 4위를 했는데 잘했어요. 마침 선배 언니들이 우리 학교에도 동아리가 있다고 해서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한 번 해보자고 했죠. 하하, 근데 재밌는 거예요. 그리고 선발전에서 우리가 대표팀을 이기고….

중세 스코틀랜드의 얼음판 놀이였던 컬링은 1998년 일본 나가노 대회 때부터 정식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됐다.

▽기자
=하긴 ‘그냥 컬링’이라는 소설에서도 교실 복도청소를 하며 ‘비질 솜씨’를 뽐내던 중학생들이 컬링부 창단 6개월 만에 전국 주니어대회 2위에까지 오르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신 선수=하하, 우리도 완전 병아리, 햇병아리들이었죠.

곁에 있던 동갑내기 최민석 대표팀 코치가 말을 받았다. 최 코치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치열하다. 실업팀만 해도 남자 2개팀, 여자 3개팀이나 된다. 거기에 대학부도 있고 동호회 팀도 있다. 이번에 열리는 대표팀 선발대회(21∼26일)에도 남자 8개팀, 여자 5개팀이 출전한다”고 말했다.

▽기자=대한컬링경기연맹이 창설된 게 1994년이니까 당시엔 컬링팀도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 다들 대학 동아리에서 시작했나요.

▽신 선수=예. 그때만 해도 정식 실업팀이 없었고 경북과학대 동국대 한국체육대, 그리고 제가 다녔던 성신여대 정도였어요. 초창기여서 사람들도 잘 모르고…. 지금도 모르지만 당시엔 더 몰랐죠. 저희 학교는 지금 빙상협회 부회장이신 김현경 교수님이 동아리를 만드셨어요.

▽기자=참, 기사를 검색해보니 컬링장이 태릉선수촌에 하나, 그리고 경북 의성에 하나 있던데 의성은 좀 의외였습니다.

▽최 코치=저도 경북과학대에서 동아리 활동부터 시작했습니다만 경북과학대 김경두 교수님이 10년을 뛰어다녀 의성에 컬링장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경북의 컬링 역사가 대한컬링연맹 역사와 같습니다.

▽기자=신 선수는 맏언니고 결혼도 했다던데 혹시 다른 생업을 가지고 있나요. (기자는 이때까지도 우리 컬링 선수들이 자기 직업을 가진 아마추어인 줄 알았다.)

▽신 선수
=(약간 샐쭉하며) 컬링이 제 직업인데…. 사실 대학 졸업 후 1년을 놀았는데 컬링이 재미있어서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는 거예요. 전지훈련도 했지만 부모님 밑에 있었기 때문에 돈 문제는 별로 못 느꼈어요. 그 후 4년간의 대표생활 때도 그랬어요. 또 감독님이 실업팀을 창단해 우수 선수로 급여를 받으니까 컬링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어요.

▽최 코치=컬링이 생활스포츠로 자리 잡은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직업선수’ 체제가 아니라 대표선수들이 직장을 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신 선수가 속해 있는 경기도체육회도 강원도청이나 전북도청 같은 정식 실업팀은 아닙니다. 우수 선수를 선발해 급여만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컬링을 지원해줘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정식 실업팀이 만들어지면 여건이 더 좋아질 겁니다.

▽기자=원점으로 돌아가서, 컬링이 왜 좋은가요.

▽신 선수=컬링을 처음 보면 스톤 던지고, 브러시로 닦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둑이나 장기처럼 작전을 하나하나 구사하다 보면 머리도 좀 좋아지는 것 같고….(웃음)

▽기자=그래서 컬링은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까. 혹시 중독성도 있습니까.

▽신 선수=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해본 사람만이 알 것 같습니다. 이번 캐나다 레스브리지 세계대회 때도 많은 교민이 응원을 오셨는데 처음엔 뭘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건지도 모르고 태극기만 흔드셨다고 해요. 그러다 두 게임, 세 게임 보면서 컬링의 재미에 빠져 가게문도 닫고 오시는 분도 생겼다고 합니다.

▽최 코치=당구 골프 장기 오목 체스가 모두 맞물려 있는 게 컬링입니다. 그리고 짜릿한 쾌감이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역전이 많았는데 마지막까지 누가 이길지 모르는 쾌감이 있습니다. 또 지도자나 감독, 코치에 의해 움직이는 다른 종목과 달리 컬링은 선수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2시간 반 게임하는 동안 한 번의 작전타임이 허용되는데 그것도 선수가 부르면 감독이 내려갈 뿐입니다. 그런 점에 매료돼 아이를 보냈다는 학부모도 있습니다.

민주적이라는 얘기인가? 아무튼 말이나 글로는 컬링의 매력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그냥 컬링’을 쓴 최상희 작가 같은 관전 포인트도 있다. 그는 작가 후기에 이렇게 썼다. “우연히 접한 컬링은 시종 쓸고 닦는 게 도무지 겨울올림픽 정식 종목답지 않았다. 다들 파이팅을 높이 외치는데 혼자만 딴짓하고 있는 느낌이라 마음에 쏙 들어 버렸다.”

▽기자=신 선수는 결혼을 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남편도 컬링 선수입니까.

▽신 선수=아뇨. 대학입시 체육을 준비하면서 만났는데 지금은 드라마나 영화의 캐스팅 디렉터를 하고 있어요. 2001년 아시아태평양컬링선수권대회에서 우리가 1등을 했는데 군 복무하던 신랑이 그때 TV 중계를 보고 다시 연락을 해서 재회하게 됐어요. 결혼할 때 ‘컬링을 못하게 하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았죠.(웃음)

▽기자=결혼 5년차라고 했는데 아이는 일부러 갖지 않는 건가요.

▽신 선수=아직…. (옆에서 최 코치가 ‘운동하느라 아기를 못 낳았다’고 하자) 팀 운동이다 보니 한 사람 빠지면 팀 전체가 돌아가지 않아요.

▽기자=컬링을 얼마나 더 할 생각인가요.

▽신 선수=이번 세계선수권대회 4강으로 올림픽 메달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갔어요. 제 꿈은 올림픽 무대에 서는 거예요. 한국 컬링이 아직 한번도 올림픽에 나간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메달을 따는 거예요. 가능하다면 2018 평창 겨울올림픽까지 가고 싶어요.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기자=2014 러시아 소치 겨울올림픽은 금메달이 목표입니까.

▽신 선수=예. 이번에 가능성을 봤기 때문에…. 우리가 여태까지는 꼴찌나 맨 밑에서 맴돌았는데 이번에 조금만 더 하면 금메달도 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레스브리지 대회 준결승에서도 조그만 실수 하나로 동메달을 못 땄어요.

▽기자=조그만 실수?

▽신 선수=우리 팀과 상대 팀 합쳐 모두 8명이 시트(sheet·링크) 안에서 움직이다 보니 머리카락 같은 이물질이 떨어지곤 하는데 그걸 제대로 닦아내지 못하면 스톤이 팽 돌아버리거든요. 그런데 경기를 마무리하는 순간에 그게 나왔어요. 그래서 너무 아쉬웠어요.

▽기자=머리카락 때문이라면 게임을 무효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 코치=그것도 실력입니다. 그래서 선수들이 정말 정성을 다해 브러시로 얼음을 닦아줘야 합니다. 이번에 그런 경우가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예선이지만 두 번째는 준결승, 그것도 게임 후반에 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3점을 뒤졌는데 축구로 치면 0-2 정도로 벌어진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에 4강에 안착해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1, 2, 3위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게임이 7, 8게임이나 됩니다.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기자=무엇보다 소치에서 메달을 따느냐 못 따느냐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신 선수=예. 제가 컬링 1세대로서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하나의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자=좀 다른 얘기지만 이른바 비인기 종목이라 해외 전지훈련을 갈 때도 좀 속이 상한다든지, 다른 종목하고 비교되는 게 있을 같은데….

▽신 선수=(웃으며) 많은 지원을 받긴 하지만 아직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쬐끔’ 부족할 때도 있습니다. 힘들게 훈련하고 와서 ‘오늘은 또 뭘 해먹을까’ 하고 고민해야 할 때가 그렇습니다. 선수들이 밥 먹는 문제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 나나 (결혼해 두 살짜리 아기까지 있는) 현정이도 그렇지만 결혼도 안 한 동생들이 그걸 걱정할 때 좀 속상하죠. 그리고 그 맛없는 음식을 코치님이 먹어줘야 할 때도….(웃음)

▽기자=그것뿐입니까.

▽신 선수=우리가 캐나다로 전지훈련을 가는 이유는 우선 얼음 때문입니다. 국내 얼음은 사이클 선수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전지훈련 가서 외국의 얼음을 볼 때마다 우리도 이런 얼음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따로 전지훈련 가서 적응훈련을 안 해도 되고, 세계대회 성적도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죠.

▽기자=빙질(氷質)은 역시 돈 때문이겠죠.

▽최 코치=처음엔 컬링장만 좀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되고 나니까 얼음이 국제적인 수준이 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음 깎는 기술에도 레벨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눈대중으로 깎는 수준입니다. 캐나다 같은 곳에서는 대회 3, 4일 전부터 얼음 수평 맞추는 작업을 합니다. 그게 기술입니다.

사실 컬링은 비인기 종목이 아니라 ‘비인지(非認知) 종목’에 가깝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신 선수에게서 ‘비인지의 설움’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힘들게 훈련하고 밥까지 해먹어야 하는 국가대표 선수의 처지를 얘기할 때도 시종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뭘까? 신 선수의 성격이 원래 밝아서일까? 그렇겠지만…. 그것뿐일까? 혹시 컬링 때문이기도 한 것 아닐까?

‘그냥 컬링’에서 주인공인 으랏차 차을하는 자기를 컬링팀에 끌어들인 친구 ‘산적’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왜 하는 거냐. 컬링?”

“그게… 중요하냐?”

“듣고 싶다. 왜냐?”

“그냥.”

“그. 냥.”

“숨통이 툭 트이더라. 왠지 모르지만 그냥.”

뭔가가 그냥 좋아서 하는 사람, 그냥 좋아하는 것이 자기 삶의 일부가 된 사람, 그게 이제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게 된 사람, 신 선수의 성격도 그렇게 컬링 (curling)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컬링#신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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