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라일라 오딩가 케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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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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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경제개발 첫 단추 잘 끼운 한국을 보고 배우는 중”

케냐 라일라 오딩가 총리는 “한국과 케냐는 1960년대 초 경제개발을 시작했지만 50여 년이 흐른 지금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식민지와 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의 기적은 많은 개발도상국들에 그 자체로 희망”이라고 말했다. 나이로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케냐 라일라 오딩가 총리는 “한국과 케냐는 1960년대 초 경제개발을 시작했지만 50여 년이 흐른 지금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식민지와 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의 기적은 많은 개발도상국들에 그 자체로 희망”이라고 말했다. 나이로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케냐 나이로비 국제공항에 내리자 로밍한 휴대전화에서 외교통상부가 보낸 ‘소말리아 국경 60km 이내 여행은 가급적 취소 또는 연기 요망’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공항에 마중 나온 지인은 1일에도 나이로비 시내에서 소말리아 반군의 폭탄 테러가 발생해 1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호텔 진입로부터 검문검색이 심했다. 무장 요원들이 호텔에 들어오는 모든 차량 탑승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물론 폭탄 탐지기를 동원해 트렁크까지 열었다. 도시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차기(내년 8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현 므와니 키바키 대통령과 연합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라일라 오딩가 총리(56)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인터뷰 요청’을 넣은 뒤 날짜가 잡혔으나 여러 번 미뤄졌다.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귀국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으로 나서는 순간 연락이 왔다. 4일(현지 시간) 공관 안에서 총을 든 무장 군인들로부터 가방 속까지 뒤집어 보이는 검색을 마치고 그와 마주 앉았다. 케냐를 넘어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인 소말리아 해적 이야기부터 했다.

―나이로비에 오니 말로만 듣던 소말리아 반군 테러가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지난달 30일 전투기까지 동원해 케냐 정부군이 소말리아에 직접 들어갔는데….

“해적들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육지 지역을 폭격해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알샤바브는 오랫동안 존재해온 위험한 테러 단체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테러로 소말리아 국경에서 죽어가고 있다. 케냐 공무원들까지 살해되는 상황이다. 소말리아는 우리의 이웃이기도 하다. 그들은 20년 전부터 안정된 정부를 갖고 있지 못하다. 많은 국민이 심각한 경제난으로 굶어죽고 있으며 케냐로 탈출하고 있다. 케냐에는 현재 60만 명을 수용한 세계 최대 난민캠프가 있다.”

그는 “최근에는 무고한 관광객들까지 납치 살해되는 상황에서 더 두고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하에 반군 소탕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나이로비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는 서양인보다 동양인이 많았다. 대부분은 중국인이다. 고급 식당이나 호텔 로비에는 사업차 방문한 사람 외에 관광객도 많았다.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이 미국보다 크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케냐인들에게 한국은 아직 낯선 나라다. 기자가 나이로비에서 묵은 호텔 숙박 영수증에는 ‘north korea’가 인쇄돼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 언론과는 처음 만난다”는 오딩가 총리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현대사는 물론 경제 성장 과정까지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한국이 전쟁 이후 그렇게 짧은 기간에 경제 기적을 이룬 비결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한국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서울에도 여섯 번이나 갔다. 업무 목적도 있었지만 관광 차원에서 간 적도 있다. 친한 친구들도 있다. 한국인들은 정말 친절하고 부지런하다. 한국인들의 모든 것이 내겐 흥밋거리다.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씨가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초대 부통령이었기 때문에 나하고 비슷한 경우인 것 같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웃음).”

오딩가 총리는 정치 귀족 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케냐가 영국에서 독립한 이듬해인 1964년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그러나 이후 대통령의 장기독재에 반대해 투옥돼 민주 투사가 된다. 고등학교까지 케냐에서 공부하고 동독으로 건너가 기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오딩가 총리는 “동독에서 공부할 때 외국인 신분으로 서독으로 잠시 여행을 가 자본주의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경험했다”고 했다. 그는 귀국한 뒤 나이로비대에서 교편을 잡다가 액화석유가스 실린더 제조회사 경영진으로 참여했으나 1982년에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6개월간 옥살이를 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6년간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최근 기자가 방문한 르완다에서도 새마을운동이 벌어지고 한국을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본보 10월 31일자 A1면 참조
A1면 르완다 “한국을 롤모델로”…

“내전과 식민지라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나라 중에는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주목하는 국가가 많다. 케냐도 마찬가지다.”

그는 “케냐는 물론 가나 같은 나라도 한국과 비슷하게 1960년대 초반부터 경제개발을 시작했지만 지금 차이는 엄청나다”고 했다.

―그런 차이는 어디서 왔다고 보는가.

“매니지먼트의 차이라고 본다. 케냐는 한국에 비해 미스 매니지먼트(잘못된 경제운영) 때문에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시장경제를 하긴 했지만 더 개방적이고 자립적인 모델을 추구했어야 했다고 본다.”

―당신의 삶은 케냐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보인다. 정치 철학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유주의를 신봉한다. 아직도 세계에는 비효율적이며 족벌 위주의 경영을 하는 기업들이 있다. 기업들은 경쟁을 해야 하며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 케냐 역시 훌륭한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게 숙제다. 단순한 분배가 아닌 경쟁을 통한 성장, 양질의 인력을 사회에 공급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이라고 본다.”

인구는 한국보다 훨씬 적지만(3800만 명) 면적은 6배에 달하는 케냐는 동아프리카 거점 국가이자 교통의 중심지다. 아프리카 유엔본부도 나이로비에 있다. 케냐는 사회주의를 채택한 주변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친서방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해 1980년대 말까지 ‘아프리카 모범국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안정적인 성장을 했다. 그러다 90년대 이후 가뭄과 주변국(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으로부터의 난민 유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도 나이로비의 발전상은 놀랍지만 인구의 60%는 하루 소득 1달러에도 못 미칠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하다.

화제를 바꿨다.

―케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생부(生父)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와 인연이 있는가.

“나는 같은 부족(루오족) 출신이며 외가쪽 삼촌뻘로 나와 친했다. 그는 매우 현명하고 용감하며 보기 드문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케냐 정부 재무부에서도 일했다. 직설적이고 바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내 생각에 아들(오바마)보다 더 똑똑했던 것 같다(웃음).”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인 2006년 8월 생부가 태어난 코겔로를 직접 방문했다. 그의 생부는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지만 그의 의붓할머니(오바마 친할아버지의 다른 부인)와 숙부 등 친척이 아직도 많이 산다고 한다. 케냐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된 직후 의붓할머니에 대한 테러 위험에 대비해 비상경계령을 내리기도 했다.

오딩가 총리는 2008년 대통령과 함께 대연정을 이끌면서 지난해에는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새 헌법을 국민투표 67%라는 높은 찬성률로 통과시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차기에 유력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헌법을 통과시켰다.

“1963년 독립헌법은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줘 의회, 지방정부, 국민 모두가 대통령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됐다. 그 결과 부정부패, 족벌주의, 부족주의가 난무했다. 지난해 통과시킨 헌법은 중앙정부 권한을 대폭 지방정부로 분산 이양시켰고 중앙정부로부터 받은 자원을 독자적으로 관리 운영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했다. 공직과 정계에 여성할당비율을 정했으며 부족차별, 인종차별, 지역차별을 없애는 법안도 넣었다.”

―아프리카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아프리카는 새로운 개척시장이며 마지막 남은 국제적 투자처다. 지난 20년간 아프리카 경제성장률은 평균 5%였다. 일부 국가는 10∼13%에 이른다. 향후 10년, 20년이 지나면 우리 소득 수준은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다. 이제 세계는 미국 유럽을 넘어 아프리카 아시아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조만간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유럽에 ‘문화 한류’가 있다면 아프리카에는 ‘경제 한류’가 불고 있었다. 그들 눈에 한국은 50여 년 전만 해도 같은 출발선에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면에서 한참 앞서가는 나라다. 지금 우리의 눈과 귀는 미국과 유럽의 위기에 쏠려 있다. 하지만 “한국을 희망”이라고 말하는 아프리카를 보면서 이제 우리의 눈도 아프리카로 돌려야 할 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들이여, 아프리카를 다시 보자. ―나이로비에서
▼ 케냐는 어떤 나라 ▼

1963년 영국에서 독립한 케냐는 동아프리카 제1의 경제대국으로 지역 안정의 기둥 역할을 해왔다. 1964년부터 2002년까지 대니얼 아랍 모이 대통령이 장기 집권했다. 이어 2002년 대선에서 부통령을 지낸 바 있는 므와이 키바키 후보가 강력한 야당세력이었던 오렌지민주당 라일라 오딩가 대표와 단일화를 이뤄내 63%의 지지율로 케냐의 38년 독재를 종식시킨다.

그러나 2007년 12월 대선에서 오딩가 대표는 키바키 대통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선거 불복을 선언했다. 유럽연합(EU)도 투표에 투명성이 결여되었고 불법 행위가 난무해 결과의 합법성이 의문시된다며 외부 감사를 촉구했다. 당시 키바키 대통령을 지지한 키쿠유족과 오딩가 후보를 지지하는 루오족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나면서 ‘제2의 르완다 사태’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07년 12월 한 달간 무려 1500여 명이 숨지고 60만 명이 집을 잃었다.

결국 키바키 대통령은 유엔 중재하에 2008년 4월 오딩가 대표를 총리로 임명해 연합정권을 선언했다. 기자가 만난 나이로비 택시운전사, 호텔 종업원 등은 “오딩가 총리는 암살당하지 않는 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케냐는 동아프리카 5개 국가 연합(EAC·East African Community·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나라 인구는 총 1억3000만 명. 지난해 상품 노동 자본 등의 공동시장을 출범시킨 EAC는 2012년 공동화폐, 2015년 EU 같은 정치연합까지 목표로 하고 있다. 9월에는 케냐 나이로비에서 도로 항만 파이프라인 등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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