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구자룡]경제 위기로 구겨진 자존심… 그리스 자살 1년새 40%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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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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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 국제부
구자룡 국제부
“우리는 오스만 제국과 독일 나치 침입으로부터도 나라를 지켜왔다. (서양 문명의 뿌리인) 크레타 문명을 이어받아 ‘크레타 남성’의 기개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나 이젠 지킬 수 없게 됐다.”

“남편으로서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최근 그리스에서 자살 충동 때문에 상담 기관에 전화를 건 35세에서 60세 그리스 남성들이 털어놓은 하소연이다. 물론 전화를 건 사람들은 1, 2년 전부터 불거진 경제위기로 큰 곤경에 처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리스 정부 통계를 인용해 그리스에서 올해 1∼5월 자살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가량 증가했다고 22일 보도했다. 한 상담기관에는 하루 평균 4∼10통이던 ‘자살 고민 전화’가 최대 100통까지 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유럽 정신문명의 뿌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재정 및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얼마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우울한 시대상이다. 금융위기를 겪는 다른 유럽국이나 미국에서도 자살률이 다소 오르긴 했다. 하지만 그리스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 같은 그리스인 특유의 자존심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그리스정교가 정신질환이나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도록 한 것에 비춰볼 때 실제 자살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는 지난해 5월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중앙은행 등으로부터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유로 체제를 붕괴시키는 주범으로까지 몰리며 동네북 신세가 됐다.

그리스 정부는 21일에도 구제금융 6차분(80억 유로)을 받기 위해 추가 긴축 조치를 발표했다. 봉급과 연금을 삭감하고 공공기관 일자리를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육책이다.

그리스인들의 늘어난 자살 통계를 보면서 개인이든 국가든 최소한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자존심 못지않게 ‘지갑과 곳간’을 든든하게 지켜야 함을 새삼 절감한다.

구자룡 국제부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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