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길구]1300년을 넘어 혜초 스님을 만난 날

  • 동아일보

이길구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경영기획실장
이길구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경영기획실장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보기 위해서다. 작년 말 그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이 우리나라에 왔다는 소식에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소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객들로 붐볐다. 기획전시실 입구에는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쏙 들어왔다.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니 전국에서 오신 스님들로 만원이었다. 스님들은 그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산속에서 모여들었다. 혜초 스님을 뵙기 위해서다.

필자는 실크로드와 아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20년 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밟았다. 중국 시안에서부터 시작해 이탈리아 로마까지 긴 여정을 탐사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넜고 톈산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중앙아시아를 횡단하기도 했으며 이슬람문화의 진면목을 만끽했다. 3년여에 걸쳐 특집기사를 싣고 기행전집 4권도 발간했다. 이런 인연이 있으니 실크로드라는 말만 나오면 ‘자다가도 귀가 쫑긋’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닐까. 나의 생활을 지배하던 실크로드는 이후 계룡산을 만나면서 아득한 신기루처럼 멀어져 갔다. 끝날 것만 같던 나와 실크로드의 인연은 몇 년 전 한 실크로드 학자를 만나면서 다시 이어져 해마다 여름이면 실크로드를 안내했고 대학과 기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전시실에서는 실크로드 내 진귀한 많은 유물들이 보였다. 그동안 현지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간단하게 압축해 놓았다. 왜 실크로드가 동서 문화의 대동맥인지를 그곳의 도시와 그들의 삶을 통해 확연히 알려준다. 상당수가 둔황에 있는 유물들로 구성돼 있으나 우리가 쉽게 대할 수 없는 샤오허 묘지, 아스타나 고분, 후이(回)족이 자치구를 이루고 있는 닝샤 지역의 유물도 즐비하다. 모두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잘 알다시피 이 자료는 스님이 700년대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그는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방문하여 그 지역의 풍속과 지리, 역사 등을 후세에 전달한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이 기행문을 쓴 시기로 보면 1283년 만의 귀향이요,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둔황에서 발견한 지 103년 만의 일이다. 앞뒤가 훼손된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인 이 여행기는 총 227행으로 남은 글자 수는 5893자이다. 스님은 이 여행기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 문서가 우리나라에 오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우여곡절을 겪었다.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이번 전시회에 출품됐다.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약 1300년 전의 문서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글씨가 정교했고 보존도 비교적 깨끗했다. 나는 이 문서를 보고 또 봤다. 앞으로 내 인생에 이 같은 축복은 더 없으리라는 확신 때문에. 노트를 꺼내 붓펜을 들고 정성스레 필사도 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필사하고 싶다. 이 문서를 필사하면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았다.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혜초 스님을 만났고 또 나를 만났다.

이길구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경영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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