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창원]선거공약에 발목 잡힌 日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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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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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가 정권교체 이후 ‘일본답지 않은’ 소란스러움에 빠졌다. 찰떡 공조를 과시해온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표류하고 있고 회복할 기미를 보이는 듯하던 일본경제는 다시 주저앉을 위기에 처했다.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들은 연일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는 굵직굵직한 현안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화두 중 하나는 급증하는 재정적자다. 현재의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국채를 남발하는 이른바 미래를 담보로 한 위기탈출 전략이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재정적자는 860조 엔으로 국내총생산의 170%에 이른다. OECD 20개국의 평균 재정적자비율인 72.5%를 크게 웃돈다. 심각한 재정적자로 민주당 정부는 내년 신규국채 발행규모를 올해와 비슷한 44조 엔 이하로 묶기로 했지만 최근 이 계획을 포기했다. 민주당 정부가 정권공약으로 내세운 각종 복지공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채발행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내년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심에 신경 써야 하는 민주당은 파탄지경에 이른 재정의 건전성 회복 대신 국민과의 약속을 선택했다.

민주당 정부가 내세운 복지공약을 보면 솔깃하다.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자녀 1명당 다달이 2만6000엔을 지원하는 아동수당 신설, 운전하기 겁날 정도로 비싼 고속도로 통행료 폐지, 고교 학비 무상화, 유류세 일부 감면, 농가소득 보전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벅차다. 모두 일본 국민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경제 부담을 정부가 덜어주겠다는 약속이다.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비행장의 이전 재검토를 둘러싼 일본 사회의 분란 역시 민주당 정부의 ‘입’에서 비롯됐다. 대등한 미일관계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은 상징적인 조치로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밖 이전을 약속했다. 1996년 미일 정부가 합의한 후텐마 기지 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던 지역 민심은 민주당의 공약이 나오자 오키나와 밖 이전 목소리에 급격히 힘이 실렸다.

그러나 민주당의 오키나와 공약은 기지 이전 보류에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급조된 성격이 짙다. 국민과의 약속 못지않게 고려해야 할 상대국과의 합의는 무시됐고 민주당 정부는 국민과의 약속이므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급기야 미국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자 일본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공약에 집착하는 민주당 정부와 달리 정작 그 수혜자인 일본 국민은 공약 실행에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당장엔 득이 될지 몰라도 10년 20년 후를 걱정해 주저하고 있다. 오히려 국민들 사이에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 대신 복지공약을 축소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속도로 통행료 무료화에 대해서는 여론의 70%가 부정적이다. 미국과의 대등한 외교를 주장하는 민주당에 통쾌하다는 의견보다 이성적 해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많다. 무리한 공약을 잔뜩 늘어놓고 우왕좌왕하는 민주당을 겨냥해 약속했으니 무조건 지키라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정권을 내놓으라는 정치적 역공도 찾아보기 힘들다.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공약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논리도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 상황이 바뀌면 여건에 맞는 타협점을 찾는 것도 정치의 책임이다. 세종시 공약 논쟁으로 한국도 어수선하다. 하지만 한국의 세종시 논쟁에서는 미래에 대한 차분한 고민보다 눈앞의 이익과 정치공세가 우선시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창원 도쿄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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