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 ⑤]현해탄 맴도는 「조센진」

입력 1998-02-10 20:13수정 2009-09-2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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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玄海灘)은 파도만 넘실거릴뿐 말이 없다. 일제(日帝) 수탈을 못이겨 또는 강제 징용을 당해 화물칸에 몸을 실어야 했던 동포들의 숱한 사연을 지켜본 검푸른 바다…. 그러나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이이쓰카(飯塚)시. 일제말기 우리 동포들이 강제로 끌려와 석탄을 캐내던 ‘쓰쿠호(筑豊)탄광지대’의 중심도시다. 60년대말 탄광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질나쁜 탄을 쌓아둔 보타산(갱석산)도 없어지고 두세곳만 남았다. 그 대신 번듯하게 들어선 집과 빌딩 그리고 골프장들. 그 속에 질곡의 역사는 숨겨져 있었다. 쓰쿠호 일대에는 3천여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이 곳에서 만난 배래선(裵來善·76)씨. 희생 동포의 추모비건립 실행위 대표를 맡고 있는 그에게서 징용 1세대의 ‘굴절된 인생’을 전해 들었다. 전남 고흥의 한 빈농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43년 현해탄을 두번 건넌다. 거간꾼에 속아 군수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고국으로 탈출, 11일만에 징용자로 다시 끌려왔다. “낮밤을 번갈아 가며 하루 12시간 정도 석탄을 캐냈어. 식사는 강냉이와 보리 등으로 만든 잡곡밥 7부에 종이처럼 얇은 다꾸앙(단무지) 2조각, 소금국이 고작이었지. 친화료(親和寮·기숙사)에서 8명이 함께 생활했는데 2명이 사라졌어. 아마…. 나는 목숨을 걸고 도망쳤어.”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떠돌아 다니다 60년경 일할 자리를 얻고자 도망쳤던 탄광을 다시 찾았는데 그 때는 조센진이라는 이유로 일감을 주지 않더라고. 몰래 빚은 막걸리와 도살장에서 산 소내장을 마누라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팔러 다녔어.” 당시 후쿠오카현에만 17만여명이 징용당해 왔다. 그중 15만여명이 쓰쿠호 탄광지대에서 일했고 2만여명이 화재나 낙반(落盤)사고 등으로 사망했다는 통계가 있다. 시메(志免)탄광에서 간호사로 일했다는 기타지마 지요(84·시메 거주)할머니도 “낙반 등으로 죽은 사람은 화장했다”고 회고했다. 일본 법무성 자료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터지던 37년 70여만명에 불과하던 재일 동포는 국가총동원법(38년), 징용령(42년) 등을 거치면서 44년 1백93만명으로 늘어났으며 해방 직전 2백40만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제의 강제 징용은 3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그에 앞서 이주(移住)노동이 이루어진 것은 1880년대. 사토 쇼닌(佐藤正人)아시아문제연구소장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1897년 사가(佐賀)현 나가모노(長者)탄광에 약 2백30명이 일하러 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한일합병 뒤 호황을 맞은 일본은 저임금 노동력을 요구하게 됐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식량증산계획 등으로 몰락한 우리 농민층의 도일(渡日)은 늘어갔다. 20년대부터는 일본도 불황기에 들어 실업문제가 발생하자 도항을 조절, 또는 제한하기도 했으나 피폐해진 농촌에서 더이상 연명하기 어려워 무작정 도일하는 동포들은 늘어 갔다. 이들은 주로 철도 댐 도로 터널 항만 등의 공사현장이나 광산에서 육체노동으로 고된 삶을 살았다. 해방후 정정(政情)불안과 6.25전쟁의 발발 등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60여만명의 동포들은 극심한 차별을 삭여가며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95년 현재 17만4천여명(전체 66만6천여명의 26%)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 오사카(大阪)부. 그중에도 이쿠노(生野)구는 대표적 동포 밀집지역으로 4만여명이 살고 있다. 전체 주민 4명 중 1명이 동포인 셈인데 제주 출신이 특히 많다. 이쿠노구가 제주인의 터전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제주인의 끈끈한 친족관계 때문이라는게 서울대 인류학과 이문웅(李文雄)교수의 설명. 광산 김씨는 예외적이지만 오사카 근교에 문중묘지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쿠노구 한복판의 조선시장 ‘코리아타운’에서 남원상점이라는 해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조의현(趙宜炫·83)씨. 제주 구좌면 하도가 고향인 그는 32년(당시 17세) 배삯 3원을 내고 제주―오사카를 잇는 군대환(君代丸·1922년 취항)을 탔다. “하루종일 자전거 페달 붙이는 일을 하고 50전을 받았어. 하기 싫으면 떠나라는 식이었지.” 그는 모진 고생끝에 장사에 수완을 발휘, 지금은 코리아타운의 원로로 통한다. 5남6녀를 낳아 증손자까지 48명의 대가족을 이뤘다. 하지만 만경봉호를 탄 큰 딸은 연락이 끊겼다고 한숨지었다. 재일동포는 밀도(密度)로는 제주 출신이 높지만 절대적인 수는 경남이 21만7천여명, 경북이 14만4천여명으로 전체의 56%를 차지하고 있다. 제주인은 11만4천여명이고 전남북은 합쳐서 6만3천여명. 그만큼 영남의 농촌 몰락이 심각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일본에 객원교수로 와 있는 배제대 강창일(姜昌一)교수는 설명했다. 고려대 객원교수인 재일동포 2세대 장군삼(張君三)씨는 오사카의 건국학교 졸업생으로 유일하게 도쿄(東京)대에 들어간 당대의 수재(秀才). 개인 사정으로 중퇴, 교토(京都)대에서 국제관계사를 전공한 그는 1천5백페이지 분량의 ‘한국학 용어사전’을 정리중이다. 이기문(李基文)전서울대교수의 ‘당신의 우리말 실력은’을 일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함께 준비중인데 한국어 구사능력이 대단하다. 그는 “자신이 있으면 차별도 없다”면서 귀화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왜 못난 쪽으로 가느냐”걋복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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