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기드온의 나팔소리

  • 입력 2000년 4월 26일 23시 31분


감독: Robert Collins

출연: Henry Fonda (Gideon), Jose Ferrer (Abe Fortas역)

John Houseman (Earl Warren 대법원장 역)

여호와의 신이 강림하시어 기드온으로 하여금 나팔을 불게 하시니 동포들이 모여 외적을 물리치다. - 구약성경 판관기(사사기) 제6장 34절

한 국제적 고급 호텔 스카이 라운지 식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구레나룻이 무성한 한 사내가 기막힌 향내의 시거를 두어 모금 빨다가는 서둘러 비벼 끄고 휴지통에 내 던졌다. 선망과 질책의 눈길을 주는 옆자리의 사내에게 이 정도 담배는 쿠바에는 지천으로 깔려 있소. 건너편 자리의 청년이 질세라 반응한다. 병째로 주문한 보드카를 한 모금 들이키다 말고 내동댕이치면서 내뱉는다. 이 정도 술은 러시아에서는 거지도 마시질 않아. 이 법석 중에도 홀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서류를 펴놓고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내가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을 번쩍 들고는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손바닥을 털면서 그 자는 엉터리 미국 변호사였소.

유머 집의 한 구절이다. 쿠바의 시거, 러시아의 보드카처럼 변호사는 미국의 잉여물자이자 특산물이다. 남산에서 명동을 향해 돌을 던지면 사장님 머리에 맞는다는 말처럼, 뉴욕 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내면 십중팔구는 변호사를 친다는 오래된 유행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흔해빠진 미국 변호사도 돈 없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1963년 얼 기드온이라는 한 중년 사내가 분 트럼펫 소리에 연방대법원이 화답하기까지에는.

영화 <기드온의 트럼펫>(Gideon's Trumpet)은 그 역사적인 판결의 과정을 재현한 영화다. 이미 판결 직후에 나온 같은 제목의 소설로(Anthony Lewis 저, 1964) 미국인에게는 친숙한 내용이기도 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죄수복을 입은 기드온이 변호사에게 자신의 일생을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4살에 가출하여 쉰 한 살이 되도록 4번 중죄로 대부분의 성인생활을 교도소에서 보낸 중늙은이의 팍팍한 인생여정이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술회된다. 유머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헨리 폰다의 얼굴과 음색이 진지한 사실감을 더해준다.

90분 후의 마감 장면은 건 파이터가 주역인 전형적인 서부영화 장면을 연상시킨다. 조잡스런 목조 2층 건물들 사이로 난, 마차가 다닐 법한 길을 구부정한 사내가 걸어간다. 허리의 총 대신 포켓 속에 지폐 두 장을 감추고서. 무죄판결을 받고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된 기드온이 환영 나온 사람들에게서 2달러 얻어 무고한 자신의 범행현장 으로 선언되었던 당구장 바를 향해 걸어간다. 그 걸음을 트럼펫 소리가 인도한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작게는 한 인간의 드라마이자, 크게는 1960년대 미국을 휩쓴 민권운동의 기념비적인 드라마이다. 구약성경이 전하는 기드온의 생애처럼 그에게도 나팔수의 소명이 주어졌는지 모른다. 순박한 농부 기드온에게 미디언의 정복이라는 커다란 임무가 주어졌듯이 오십 평생을 흘려버린 얼 기드온이지만 인생의 후반에 인권과 정의의 나팔을 불어 차별적 법제도를 격파하기 위한 민권전쟁의 동원령을 내린 것이다.

사내의 얼굴은 이력서다. 굵은 주름이 가득 찬 핏기 없는 얼굴, 항상 떨고 있는 목소리와 손, 연약한 신체, 나이 보다 빨리 찾아든 백발, 이 모든 것이 파란의 생애를 증언한다. 하지만 수많은 전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전문적인 범죄자도,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단지 안정된 직장을 가져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따금씩 소액 도박과 절도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동료죄수를 포함하여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그가 남에게 해악을 끼칠 만한 위인이 못되며 기껏해야 이 세상 광음(光陰)을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늙은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 기드온의 가슴속에는 맹렬히 타고 있는 한 가닥 불꽃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집착과 불굴의 정의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모한 짓이라고 냉소와 동정을 보냈으나 그는 미국의 정의 시스템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영화의 로케 장소는 법원과 교도소뿐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그에게 다섯 번 째 철창행을 명령한 판결이 연방대법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기드온은 플로리다 주의 소읍에서 야간에 당구장에 설치된 자동판매기의 동전을 턴 혐의로 체포된다. 이러한 행위는 플로리다 법 상 중죄 (felony)에 해당한다. 중죄로 기소된 기드온은 법원에 대고 변호사를 선임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판사의 대답은 플로리다 주 법은 피고인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기소된 경우에만 국선변호인을 선임해 준다는 것이었다.

연방대법원 말씀에 의하면 나는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 라는 기드온의 주장에 그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기드온은 형무소를 들락거리며 풍월로 얻은 법률지식에 의존하여 스스로 자신의 변호사가 되어야만 했다. 시골법정의 모습이 더 없이 삭막하다. 방청객은 하나 없고 증인과 배심원으로 선정된 6인의 남자, 그리고 낡은 선풍기 도는 소리만이 게으른 오후를 질책한다.

기드온은 어떤 교양인에도 뒤지지 않을 수준의 변호를 했지만 엄격하고도 복잡한 증거법의 세칙을 알리 없는 그의 변론은 번번히 검사의 항의와 판사의 제지를 받게 되었다. 배심은 즉시 유죄의 평결을 내렸고 이어 판사는 5년 징역을 선고했다. 이어 기드온은 플로리다 대법원에 대고 인신보호영장을 청구하여 자신이 불법적으로 구금되어 있다고 주장했지만 간단하게 기각 당하고 말았다.

이제 최후의 희망은 연방대법원뿐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실로 희박한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탄원서가 문을 두드리는 나라의 최고법원, 그 법원에서 심사 받을 기회를 얻는 것은 실로 하늘의 별따기이다. 연방대법원의 문서분류표에 기타사건 으로 분류되는 항목은 대부분 대법원에 정식으로 서류를 접수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약 1백 달러)을 부담할 능력이 없는 극빈자들의 자필 소송이다. 라틴어로 걸인의 행색으로 (IFP, in forma pauperis) 라는 의미를 가진 이런 형식의 청원서는 실제로 많은 복역수들이 연방대법원에 대고 자신의 복역이 연방법에 위배된 판결의 결과라고 호소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감옥에서 무료로 제공한 단선 괘지에 연필로 쓴 청원서에는 기드온의 인적사항이 거의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남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 비추어 많은 사람들이 으레 그가 흑인이려니 하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실은 100% 백인이었다. 기드온의 주장은 세련된 법적 용어가 동원되지 않았으나 그 요지인즉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의하면 모든 중죄 사건의 피고인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 주 법원이 이러한 자신의 권리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극빈 피고인에게 변호인을 선임해 주지 않은 채 행한 재판은 연방헌법의 적법절차조항(Due Proces Clause)의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관한 기드온의 해석과 주장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불과 20년 전의 판결에서 (Betts v. Brady, 1942) 대법원은 적법절차 조항은 모든 주의 형사절차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한 바 있었다. 또한 후속판결들도 피고인이 문맹, 무지, 연소, 정신능력의 부족, 판사나 검사의 불공정한 행위 등 적법절차조항의 기본정신인 본질적 공평성 이 부정된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교도소에서 수련한 풍월 법률가 기드온이 이러한 정교한 법원리를 알 리 없었고, 다만 재판 절차의 첫 순간부터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던 것은 오로지 헌법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부여한다는 맹목적인 확신뿐이었다. 대법원에 제출한 청원서는 따지고 보면 연방대법원더러 종래의 입장을 바꾸라는 엄청난 주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뜻밖에도 연방대법원의 9명의 판사 중 4명이 이 사건을 다루는 데 합의했고 기드온에게 변호사가 선임되었다. 연방대법원이 극빈자 관련 사건을 심사하는 경우에 변호사를 선임해 주는 법적 근거는 없으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확립된 전통이다.

이렇게 선임된 변호사에게 보수는 전혀 지급되지 않지만, 지고한 권위의 상징인 연방대법원에 출정할 기회 자체를 더 없는 영광으로 여기는 변호사들이 무수히 많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원장으로 공인되어 수퍼 치프 (Super Chief)로 불리는 얼 워렌(Earl Warren)원장은 기드온의 변호사로 워싱턴의 일류변호사 에이브 포타스(Abe Fortas)를 위촉했다.(포타스는 후일 존슨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원판사로 임명된다.)

자신의 조수 존 엘리 (John Ely, 후일 스탠포드 법대 학장이 된 헌법학자)와 함께 준비에 착수한 포타스는 대법원의 인적 구성이나 판례의 추세가 기드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포타스의 전문가적 예견과 기드온의 맹목적인 확신이 새로운 미국의 법으로 선언된 것은 1963년 3월 15일의 일이었다.

모든 중죄사건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필수 불가결한 권리장전의 일부이다. 보기 드문 만장일치의 판결이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미국의 모든 중죄혐의자에게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보장했지만 곧바로 기드온에게 자유를 선사하지는 못했다. 다시 한 번 같은 사건으로 같은 법원의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 다만 이번에는 변호사의 도움 속에. 시효 이중위험 등 기드온이 변호인 포타스와 전화 통화에서 들먹이는 법률용어들의 법적 의미는 일반인의 상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영화의 후반부는 같은 사건에 대한 제2의 재판에서 석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찬찬하게 그렸다. 이미 2년을 복역한 기드온이 자신의 누명을 벗겨나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변호인의 교체, 자신에게 유리한 증인의 확보 등 까다로운 주문을 주저 않고 자신의 무죄를 밝히는 노력이 보상받아 마침내 무죄평결을 얻어낸다.

첫 재판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거가 되었던, 다량의 동전을 소지했던 사실도 범죄성의 탈을 면한다. 그것은 기드온의 오랜 습관으로, 어떤 때는 100달러 어치 쿼타를 소지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하숙비조차도 동전으로 낸 적이 있다는 주인 여자의 증언이 있었다. 또한 평소에 술을 입에 대지도 않으며, 전화를 걸때도 행여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봐 복도에 설치된 공중전화기 대신 행길 건너 박스를 이용할 정도로 공중도덕이 높은 사람이라는 증언도 도움이 되었다. 범행현장에서 기드온을 보았다고 진술한 청년의 신빙성에 타격을 주는 심문과 반대증거가 제출되었다. 이 모든 것이 변호인의 전문적 지식과 변론기술이 주효했던 것은 물론이다.

영화 <기드온의 트럼펫>은 이름 없는 민초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춘다. 연방대법원의 변론 장면을 담는 미국영화는 대체로 판사와 외모가 유사한 사람을 배역으로 선택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대법원 영화 의 정석이 깨어졌다. 워렌 원장 역을 맡은 존 하우스먼을 비롯하여 대법관 역을 맡은 아홉 사람의 배우 그 누구도 실물과 전혀 닮지 않았다. 다만 변호사 포타스 역을 맡은 배우만 실물의 외향과 분위기를 풍기도록 배려했다. 그의 변론도 아홉 명의 대법관을 상대로 한 일방적인 연설에 가깝다. 법을 위한 투쟁에서 판사보다 소송 당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려임을 알 수 있다. 대법원에 보내는 청원서를 교도소 편지함에 넣는 기드온의 떨리는 손을 주시하는 수 백 개의 동료 죄수의 눈동자는 법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주인은 민초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기드온 판결 이후 연방대법원과 각급 법원은 국선변호인이 극빈 피고인을 위해 성실한 변론을 해야한다는 세부원칙을 정립해 나갔다. 그리하여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소수민족 피고인을 위하여 피고인 자신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까지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기드온의 승리는 돈 없고 힘 없는 약자, 심지어는 찾아줄 일가친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의 죄수도 나라의 최고법원을 상대로 법을 개정할 수 있도록 할 수가 있다는 가능성을 실증해 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당구장을 향해 걸어가는 기드온의 등뒤에 울려 퍼지는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Paper Chaser)의 킹스필드 교수(존 하우스먼)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사건의 의미를 정리한다.

한 외진 소읍 모퉁이에서 클레어런스 얼 기드온이 갱지 위에 연필로 사연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사연에 대법원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드온이 혼자 싸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기드온이 피를 뿜어내듯 분 나팔 소리에 법이, 정의가, 판사의 양심이, 그리고 인간 존엄을 표방하는 헌법정신이 장단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법제도의 위력이 있는 것이다.

영화 <기드온의 나팔소리>의 진정한 메시지는 이름 없는 민초가 법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데 있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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