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를 따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아시아 동맹들은 국내총생산(GDP)의 2%도 국방비에 투자하지 않는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쏟아냈다. 특히 대만을 겨냥해선 “시급함의 결여가 문제”라고 쏘아붙였고, 일본을 두곤 “헌법을 핑계 삼아 후방 지원만 가능하다고 물러서는 건 모순적”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한국만큼은 예외였다. 한국에 대해 그는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며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고 강력한 방위산업 기반을 갖춘 ‘모범 동맹국(model ally)’”이라며 콕 집어 추켜세웠다.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의 진보 정부와는 다소 껄끄러울 것’이란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왔지만,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국이 제 역할만 잘해 준다면 우린 기꺼이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韓, 핵잠 등 대미 방위 협력 기회 열려
그로부터 몇 달 뒤 ‘모범 동맹’ 얘기가 또 나왔다. 6일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한국 등 일부 국가를 미국의 국방 지출 확대 요구에 부응한 “모범 동맹들”로 평가하며 “특혜를 받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반대로 집단 방위를 위해 제 역할을 못 하는 동맹들을 겨냥해선 “그에 마땅한 결과를 마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고 숫자로 증명하라고 동맹들에 꾸준히 요구해 왔다. 약 50만 명의 상비군을 유지하면서 미국과 실전형 연합훈련을 진행하고, 이미 적지 않은 국방비까지 쏟아붓고 있는 한국은 미국이 보기에 ‘똘똘한 동맹’으로 꼽을 만하다. 게다가 최근엔 ‘K방산’으로 대표되는 방위산업 역량까지 끌어올렸으니, 한국이 중국 견제를 위한 든든한 저지선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미국은 기대하는 듯하다.
헤그세스 장관의 발언 이틀 전 백악관은 미국의 최상위 대외전략 지침인 국가안보전략(NSS)을 공개했는데, 보고서의 방점은 중국 견제에 찍혀 있었다. 특히 이를 위해 동맹국들엔 “집단 방위를 위해 더 많이 지출하고, 더 많이 행동해 달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했다.
이처럼 미국이 전방위로 동맹에 ‘부담 분담’을 압박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한국을 모범 동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에겐 나쁘지 않은 시그널일 수 있다. 특히 안보 무임승차국이 아닌 기여국이 된다는 건, 미국과의 공동생산·기술협력 등 방위 협력 기회가 더 열려 있단 의미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 군의 숙원이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것도 한국을 모범 동맹으로 보는 인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칭찬, 종착점 아닌 새로운 시작일 수도
한미는 지난달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에 “한국의 국방비를 GDP 대비 3.5%까지 늘린다”는 내용을 담았다. 최근 만난 미 국방부 당국자는 기자에게 “한국이라면 5%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사견을 전제로 한 발언이었지만 팩트시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훌쩍 높은 기준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거래적 동맹관’에 따르면, 칭찬은 종착점이 아닌 시작점일 때가 많았다. 과거의 충분한 기여를 면제 사유로 보는 대신에 더 높은 기준점을 측정하는 새로운 근거로 잡는다는 의미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강조하는 모범 동맹이란 타이틀은 중국의 대만 침공 땐 한국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북한의 공격 땐 한국 홀로 더 잘 버티란 의미가 담긴 부담스러운 훈장일 수도 있다.
결국 ‘트럼프식 동맹 체제’에서 어쩌면 가장 경계하고 긴장해야 할 순간은 칭찬받을 때일지 모른다. ‘칭찬의 역설’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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