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살기 어떻습니까]<10·끝>청년 실업자

  • 입력 2004년 9월 8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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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공고를 찾아 게시판을 뒤지는 정경섭씨. -사진제공 정경섭씨
취업공고를 찾아 게시판을 뒤지는 정경섭씨. -사진제공 정경섭씨
“첫 직장은 한 달 30만원, 둘째 직장은 70만원, 다음부터는 아예 직장이 없어졌다.”

정경섭씨(27·경북전문대 1년)는 직장이 없어 다시 학생으로 돌아갔다. 몇 가지 직업도 가져봤지만 대우가 형편없거나 봉급을 제때 주지 않았다. 불황에도 잘 버티는 안정적인 직장은 정씨를 거부했다.

정씨는 2001년 2월 모 전문대를 이미 졸업했다. 졸업과 함께 고향인 경북 영주시의 한 여행사에 취직했다. 주말도, 밤낮도 모르고 일했지만 월급은 30만원이었다. 정씨는 “햄버거가게 아르바이트보다 못한 돈이었지만 그때로서는 우선 직업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정씨는 2001년 말 인천의 한 중고차 수출업체에 입사할 수 있었다. 자동차를 좋아하던 정씨에게 회사 생활은 즐거웠다.

입사도 쉬웠고 일도 즐거웠지만 1년이 지나자 임금이 밀리기 시작했다. 70만원에서 시작한 월급은 그만둘 때 100만원으로 올랐지만 막상 제때 월급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입사한 뒤 경기가 계속 나빠졌던 것. 회사 분위기는 좋았지만 직원들의 월급은 점점 뒤로 밀렸다. 정씨는 결국 사표를 썼고 퇴직금 400만원과 밀린 월급이라도 받은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회사를 그만둔 지난해, 그는 영남지역의 거의 모든 자동차업체에 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정씨가 쓴 원서만 20여통. 그러나 경기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년 경력에 전 직장의 추천서까지 가진 정씨였지만 “회사 사정이 안 좋아서”라는 대답만 들어야 했다.

정씨는 “인터넷 취업 사이트 10여 곳에도 이력서를 올렸다”며 “계속 이력서를 고쳐가며 공을 들였지만 아직 단 한 곳에서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막막하던 올해 초, 어머니가 적금통장을 내미셨다. 직장에 다니며 정씨가 매달 집으로 보내던 50만원과 어머니가 하루 10시간씩 사과상자를 포장해 가며 모으신 돈을 더한 2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 돈으로 다시 전문대에 진학했다. 경북전문대 물리치료학과였다. “나중에 자식에게 ‘아버지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며 “물리치료사는 불황도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씨는 “지금이라도 자동차부품 하청업체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당장 취업하고 싶다”며 “추천서와 전 직장에서의 평판도 불경기 앞에서는 소용없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청년실업자 정경섭씨의 입사용 자기소개서 요약▼

▽성장 과정=4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게 늘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일 도매상으로 3남매를 기른 아버지께 성실함을 배웠고 어머니의 지친 어깨를 안마해 주시던 모습에서는 배려를 배웠습니다.

▽성격 소개=조용한 성격입니다. 그 덕에 조직에 꼭 필요한, 뒤에서 묵묵히 동료를 돕는 자세에 대해 학창시절부터 좋은 평가를 들었습니다. 꼼꼼하고 세밀한 성격은 제가 속한 그룹을 늘 최고로 만들지는 못했어도 실패는 거의 막아내도록 했습니다.

▽생활신조=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자동차 정비를 하며 온몸이 기름때로 찌들고 얼굴이 검게 그을었어도 나는 차를 좋아하니까라고 생각하며 내 차라는 생각으로 차를 대했더니 즐거웠습니다.

김상훈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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