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기자의 쫄깃한IT]미지의 누군가와 ‘랜덤채팅’ 유행

  • 입력 2009년 10월 6일 02시 58분


그 옛날 ‘물병편지’ 보낸 마음처럼

낯선상대: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당신: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생입니다.”

낯선상대: “혹시 전공이?”

당신: “국문과요.”

낯선상대: “오∼, 반갑네요. 저도 국문과 나왔거든요. 졸업했고 직장에 다녀요.”

당신: “아 예. 추석도 끝났는데…, 출근 힘드셨죠?”

이 대화, 시작이 좋아 보입니다. 이곳은 한 온라인 채팅창 속. 두 사람은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좋은 분위기도 잠시, 대화가 반전되기 시작합니다.

낯선상대: “네, 연휴 끝난 첫날이라 너무 힘드네요. 그나저나 내가 오빠니까 말을 놓아도 될까요?”

당신: “??? 전 남잔데요? 혹시 당신 남자?”

낯선상대: “우리 각자 가던 길 갑시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몰랐던 사이. 잠시나마 설레게 했던 이 채팅은 최근 젊은층에 유행하는 ‘랜덤 채팅’입니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고 하는 채팅이죠. “그게 뭐야!”라고 할 어른들도 있겠지만 점심시간인 5일 낮 12시에도 접속자가 5000명 이상일 정도로 인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랜덤 채팅 이용자의 대부분이 10, 20대라는 사실입니다. 디지털 문화 속에서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는 신세대들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셈이죠. 익명으로 ‘악플’을 달아도 몇 시간 후면 바로 들통 나는 시대. 너무나 철두철미한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랜덤 채팅은 현실을 잠시마나 잊게 해주는 달콤한 ‘꿈’과도 같습니다.

사실 랜덤 문화의 역사는 꽤 깁니다. ‘153 사서함’ 서비스, 폰팅, 부모님 세대부터 유행했던 ‘행운의 편지’까지. 이 문화의 시초는 바다에서 표류한 사람이 육지로 보낸 ‘물병 편지’가 아닐까요. 최근 한 누리꾼은 이 ‘물병 편지’를 플래시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쏴∼” 하는 파도 소리와 함께 바닷물을 타고 백사장에 미지의 물병 편지가 나타납니다. 내용은 ‘트위터’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간단한 것부터 장문의 글까지 다양합니다.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10분 만에 차였다” “선배 오빠에게 대시 받았다” 등 소소한 얘기부터 “취업 못해서 걱정이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걸까” 등 심각한 고민거리도 종종 등장합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폐쇄회로(CC)TV, 메신저마저 감시당하는 직장. 세상에 점점 비밀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더 투명하고 깨끗한 세상이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갈수록 삭막해지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랜덤 채팅과 물병 편지로 대표되는 디지털 랜덤 문화는 ‘관계’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에게 “모르는 게 약”이라고 외치는 듯합니다. 그 속에는 관계만큼은 ‘끈끈한’ 아날로그 정신으로 맺자는 뜻이 내포됐겠죠.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따라 이 노래가 생각나네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뭐야 이 노래”라며 촌스럽게 들렸던 김민기의 ‘가을편지’, 오늘은 왠지 ‘엣지’ 있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요?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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