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인간 자연]환경의 복수/'환경호르몬 공포'

  • 입력 2000년 5월 21일 23시 10분


‘1980년 미국 플로리다주 아포프카호수. 악어의 성기가 정상에 비해 3분의 1크기로 작아지고 개체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1998년 일본의 중화학공장 지대를 관통해 도쿄(東京)만으로 흐르는 다마(多摩)강. 수컷 잉어가 생식기 이상을 보였다. 정상적인 수컷의 정소는 희고 통통한데 이 강에서 표본 채집한 잉어는 10마리중 3마리꼴로 볼펜 굵기밖에 안되고 색깔도 다갈색이었다.’

‘지난 50년간 남자의 정자수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20세기 중후반들어 세계 곳곳의 생태계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자연 현상들이 하나둘 보고되기 시작했다. 수컷의 생식기능 이상, 새끼들의 원인모를 죽음, 개체수의 급작스런 감소, 행동이상….

지역도 다양했다. 미국 영국 덴마크 지중해 일본 할 것 없이 공업화가 절정을 향해 치닫는 곳이면 예외없이 생태계에 무언가 중대한 결함이 발생하고 있다는 불길한 징후가 드러났다.

이 불길한 징조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춰보던 과학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런 ‘생태계의 반란’이 화학물질과 농약 등에 의해 빚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 조각들이 지금 인류가 당면한 3대 환경문제중 하나인 ‘환경호르몬’(내분비계장애물질)이라는 모자이크 그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수년전의 일이다.

지난주 미국 노스캐롤라이주 랠리시 근교에 있는 ‘리서치 트라이앵글파크.’ 미국 최대 산학연구단지로 미국 환경청(EPA) 국립환경보건과학연구소(NIEHS) 등 수많은 국공립 연구기관이 밀집해 있는 이곳의 최대 화두는 단연 ‘환경호르몬’이었다.

“보세요. 합성 여성호르몬제인 디에칠스틸베스트롤(DES)을 주입하니까 사흘만에 쥐의 자궁이 두 배 가까이 커졌습니다.”

NIEHS내 복도 곳곳에는 환경호르몬이 동물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결과 데이터가 붙어 있었다. 60년대에 유산방지제로 널리 쓰였던 DES는 현재는 환경호르몬으로 분류되고 있다. 동물체에 주입했을 때 반응이 명확하고 빨라 다른 환경호르몬의 작용을 파악하기 위한 ‘양성 대조물질’로 널리 쓰이고 있다. DES를 주입한지 3일만에 부풀어 올라 자궁암 증세를 보인 쥐의 자궁은 환경호르몬이 동물의 생식기에 미치는 영향을 극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NIEHS의 독성실험 책임자인 마이클 셸비박사는 “인류는 오랜 기간 수많은 종류의 환경호르몬에 노출돼 왔다”며 “단기간에 환경호르몬에 노출되는 실험실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그동안 아주 오랫동안 환경호르몬에 노출돼 왔다는 점에서 앞으로 수세대에 걸쳐 중대한 환경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단지 내에 있는 EPA연구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진행하는 환경호르몬 국제 공동연구의 주도 실험실 책임자인 어 그레이박사는 “환경호르몬은 수컷의 암컷화 뿐만 암컷의 수컷화 현상도 야기한다”며 “세계 각국이 사용을 규제하는 등 나름대로 대처하고 있지만 모든 환경호르몬에 대해 대체물질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환경호르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미 국가적 차원에서 환경호르몬 문제에 대응 하고 있다. 96년 식품품질보호법과 음용수안전법을 제정, EPA로 하여금 환경호르몬 검사 방법을 정립하도록 했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매년 EPA에 환경호르몬 연구비로 1000만달러 이상을 지원해왔으며 현재 EPA NIEHS 국립독성연구소(NCTR) 등 국공립 연구기관에서 수만명의 전문가가 환경호르몬을 연구하고 있다. 이는 일본과 유럽연합도 마찬가지.

그러나 아직도 인류는 환경호르몬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할 명확한 검사 방법조차 완전히 정립하지 못한 상태다. 다이옥신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NIEHS의 채건박사는 “환경호르몬 문제는 원인과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너무 많고 오랜 연구기간이 걸리는 분야지만 인류의 대응수준은 아직 초보 단계에 불과하다”며 “하지만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기 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꾸준히 치밀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랠리(미국노스캐롤라이나주)〓이기홍기자>sechepa@donga.com

▼우리정부 대응▼

정부는 환경호르몬 문제를 전담할 조직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소에 내분비독성과를 신설, 다음달부터 본격 가동할 계획이다.

우리 정부가 환경호르몬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98년1월부터. 이때부터 보건복지부 산하 식약청 생식독성과, 환경부 산하인 국립환경연구원 환경위해성연구과, 농림부 수의과학연구원 등이 중심이 돼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특히 식약청은 지난해 4월 OECD의 ‘내분비계 장애물질 자궁비대반응 시험’ 공동연구 기관으로 선정돼 8개국 17개 연구기관과 공동연구를 벌이고 있으며 지난주에는 ‘수컷의 성선비대반응’ 국제 공동연구기관으로 선정되는 등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정부는 현재 67종의 물질을 ‘환경호르몬 추정물질’로 분류, 사용 및 유통을 엄격히 통제 관리하고 있다. 또 모유의 다이옥신 농도 등 한국인의 환경호르몬 노출 상황에 대해 지속적인 검사를 벌이고 있다.

식약청 생식독성과 한순영박사는 “내분비계 장애물질은 국민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경제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산업계에서도 대체물질 개발 등을 서둘러 국제 변화에 처지지 않아야 한다”며 “정부도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험법과 정책대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기홍기자>sechepa@donga.com

▼[인터뷰]美 환경청 어 그레이박사▼

환경호르몬에 의한 동물체의 생식기 이상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는 미국 환경청의 어 그레이박사를 만나 연구 진전 현황을 들었다.

―현재 주로 사용하는 연구방식은….

“쥐 등 실제 동물에 환경호르몬을 주입한후 3일후 죽여 자궁을 검사하는 방법과 실험실내에서 다양한 환경호르몬 물질을 표본조직에 주입해 반응을 연구하는 두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동물체의 주된 실험대상 기관은 생식기 면역체계 신경계 암세포 등입니다.”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진전이 있나.

“환경호르몬 분야는 그야말로 아주 긴 시간의 연구가 필요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연구분야입니다. 현재 수컷의 암컷화 현상은 세계 19개국의 연구소에서 자세한 실험방법을 정립하고 있으며 일본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수컷화 현상에 대한 연구는 6월부터 EPA가 시작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동물의 사춘기 전단계에 미치는 영향도 중시하고 있습니다.”

―국가 차원의 지원 정도는….

“몇년전에는 연구비를 타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워낙 국민들과 언론의 관심과 걱정이 컸던 때문에 이제는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랠리(미국노스캐롤라이나주)〓이기홍기자>sechepa@donga.com

▼환경호르몬은▼

환경호르몬은 쉽게 말하면 ‘인간이 만든 환경 오염물질에서 나오는 가짜 호르몬’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 쓰다 버리거나 사용중인 각종 화학물질, 농약 등이 먹이사슬 등을 통해 사람이나 동물의 체내로 들어와 마치 진짜 호르몬처럼 내분비계에 영향을 미쳐 생식장애 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현재 우리정부가 사용하는 공식용어는 ‘내분비계 장애물질’.

현재 세계야생생물보호기금(WWF)은 DDT 등 농약 41종과 음료수 캔의 코팅물질로 쓰이는 비스페놀A, 폐기물 소각시 발생하는 다이옥신 등을 포함해 모두 67종의 물질을 환경호르몬으로 분류하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주 EPA는 74종을 환경호르몬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WWF의 분류기준을 따르고 있는데 이 67종의 환경호르몬 물질중 국내에서 제조되거나 수입된 적이 있는 물질은 51종에 달한다. 이중 현재 농약 32종 산업용화학물질 3종 등 42종의 사용이 규제되고 있으며 나머지 9종중 비스페놀A 등 4종은 관찰물질로 관리하고 있다.

<이기홍기자>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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