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인 컬처]“남친과 단둘이 있지 마라? 이게 성폭력 대처법이라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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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 집필
‘기 센 언니’ 5인이 주장하는 한국의 성교육 현주소와 대안

1월 24일 서울 종로구 ‘건강과 대안’ 연구실에서 만난 젠더건강팀 연구원들. 의학 약학 사회학 인류학 보건학 전공자 5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피임에 관한 상식과 정보 등을 다룬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을 지난해 12월 출간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월 24일 서울 종로구 ‘건강과 대안’ 연구실에서 만난 젠더건강팀 연구원들. 의학 약학 사회학 인류학 보건학 전공자 5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피임에 관한 상식과 정보 등을 다룬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을 지난해 12월 출간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으음, 여기가 어디지?” 에이전트26(유원모)은 겨우 실눈을 떴다. 오늘은 MIC(맨 인 컬처) 지령 아래 지구에 온 첫날. 우연히 요상한 책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을 발견한 뒤 조사에 나서려던 참인데. 뭔가 뒤통수가 찌릿하더니 깡그리 기억을 잃었다. 막 정신 차린 지금, 일단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야 깼군. 당신 정체가 뭐지? 왜 우리 ‘말씀자료’를 뒤적였나.” 갑작스레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흐릿한 실루엣에 요원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성이라 부르는 종족 같은데. 지구방위군 같은 건가?’ “우린 결사조직 ‘연건대’다. 염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삐뚤어진 성(性)인식을 지닌 남성염색체가 틀림없군.” “무, 무슨 소리냐? 난 자웅동체라서….” 아차, 1급 기밀을 누설하다니. 잠깐. 아까 보던 책 집필진이 분명 ‘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줄여서 연건대? 아니 이 ‘노잼’ 작명은 뭐람. 근데 이들, 왜 점점 신문하는 척하며 강의를 하는 거지. 다단계 신종 수법인가. 요원은 점점 빠져드는 자신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이성 친구와 단둘이 있지 마라?

지난해 말 출간한 ‘…피임사전’은 원래 서울시 여성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비매품으로 500부만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다. 허나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으로 1000부를 늘려 찍었다. 그래도 주문이 쇄도해 곧 2쇄 발간을 검토 중이다.

이 수상한 사전은 왜 이리 인기일까. 연건대 조직원인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선진국은커녕 세계 꼴찌 수준인 한국 사회의 피임 인식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자평했다.

“대표적 사례가 콘돔이지. 대다수 국내 남성, 심지어 일부 여성도 콘돔을 착용하면 성감이 떨어진다고 믿어. 벌써 그렇지 않단 조사 결과(2009년 미국 내셔널서베이)가 수두룩하게 나왔는데. 해외에선 꼬마도 아는 상식인데 말이야.”

요원은 발끈했다. 지구에 첨 왔다고 바보로 아나. 애들이 그걸 어떻게 아나.

“당신, 어느 별에서 온 거지? 독일이나 네덜란드는 5세부터 성교육을 시켜. 당연히 콘돔·피임약 사용법도 가르치지. 물론 한국도 초등학교부터 교육과정은 있어. 그런데 내용이 ‘성폭력 대처법―이성 친구와 집에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2015년 교육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 수준이거든. 캐나다에선 이런 비과학적인 시각을 가르치는 교사는 해임은 물론이고 법정에 서게 돼.”(이유림·인류학 전공)

뭐, 그렇다 치자. 그래도 ‘한국적 상황’이란 게 있으니까. 피임도 알아서들 잘하잖나.

“진짜 외계인 맞나 본데? 해부를 할까 보다. 현재까지 나온 가장 안전한 피임법 가운데 하나가 경구피임약 복용이야. 헌데 한국은 이용률이 2.9%밖에 안 돼. 대다수가 약 먹다 영영 불임되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 하아, 복용을 중단한 뒤 1년 안에 79.4%가 임신해. 아무 상관 없단 소리야.”(윤 전문의)
 

 
○ 21세기에 비닐봉지 콘돔 찾는 10대들

도대체 한국은 왜 이렇게 성교육 후진국이 됐을까. 실제로 포털사이트 검색어를 찾아보면 ‘랩 콘돔’ ‘비닐봉지 콘돔’이란 말까지 나온다. 콘돔 구매가 제한적인 청소년이 나름 찾아낸, 정말 웃음도 안 나오는 ‘자구책’이다.

“이런 얘길 하면 ‘그럼 청소년 성생활을 권장하잔 소리냐’는 반발이 나와. 이런 편견이 문제를 키우는 건 인정하질 않고. 미국은 청소년에게 무료로 콘돔을 나눠주고, 성상담도 자유롭게 받게 해줘. 덕분에 낙태율이 역사상 최저로 떨어졌어. 한국은 높은 양반이 점잔 빼고 있는 동안 어린 여성들만 온몸으로 피해를 입고 있단 소리야.”(윤 전문의)

그때 갑자기, 우당탕 소리와 함께 뒷문을 박차고 들어온 에이전트2(정양환).

“잠깐, 모두 손들어! 무기를 버리고 투항….”

‘몹시 난감하군.’(tvN ‘도깨비’ 대사) 구금된 줄 알았던 에이전트26이 함께 둘러앉아 다정히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는 이미 계면쩍은 웃음과 함께 가입신청서에 날인을 마친 상태였다.

“아, 또 다른 포획감이군. 그럼 첨부터 다시 설명해 볼까. 당신, 정관수술 하면 정력이 약해질까 아닐까.”

젠장,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취는 아파요.’ 이러다 MIC가 연건대 산하기관이 되는 건 아닌지. 하긴, 좋은 취지라면 뭔들 못 하겠냐만.(다음 회에 계속)
 
유원모 onemore@donga.com·정양환 기자
#성폭력 대처법#건강과 대안#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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