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34>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23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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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줄만 남은 法 ④

기장(騎將)으로 한번 싸움터에 나서면 매섭기가 불덩어리 같은 관영(灌영)이었으나 그처럼 초라한 진왕 자영(子영)의 행차를 보자 숙연해졌다. 이긴 쪽의 위세를 애써 감추며 자영을 호위해 패상으로 갔다.

관영이 떠나올 때 들은 대로 패공 유방은 그새 지도정(지道亭)까지 나와 정사(亭舍) 옆에서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정에 이른 자영은 수레에서 내려 패공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패공이 손을 저어 말려도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삼배구고] 뒤에 따라온 수레에서 봉함된 상자 둘을 내리게 해 패공에게 바치며 말했다.

“한 상자에는 천자의 옥새가 들어있고 다른 하나에는 부절(符節)이 들어있습니다. 진나라뿐만 아니라 진나라가 맡아 다스리던 천하를 들어 장군께 항복한다는 뜻으로 이 둘을 아울러 바칩니다.”

천자의 옥새는 황제행새(皇帝行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신새(皇帝信璽)와 천자행새(天子行璽) 천자지새(天子之璽) 천자신새(天子信璽) 여섯 가지가 있는데 각기 쓰임이 달랐다. 거기다가 진나라에는 흔히 전국옥새(傳國玉璽)라고 부르는 시황제남전옥새(始皇帝藍田玉璽)가 있어 모두 일곱 가지였다. 이른바 ‘천자칠새(天子七璽)’로서 모두 크고 이름난 옥을 깎아 새긴 것이라 상자 하나를 채울 만했다.

부(符)는 특히 군사를 낼 때 장수에게 내리는 발병부(發兵符)를 말하는데 병권을 상징한다. 갈라주는 군사의 규모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또 절(節)은 신표(信標)로서 나눠진 둘을 맞춰 봄으로써 서로가 믿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사신으로 갈 때나 호령(號令)과 상벌(賞罰)의 시행 등 용도에 따라 또한 여러 가지였다.

자영이 옥새와 부절을 모두 패공에게 넘긴다는 것은 진나라가 다스리던 천하를 패공에게 넘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고, 또 은근히 바라온 일이었으나 패공은 선뜻 그 옥새와 부절을 거두어들일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패공은 자신을 교룡(蛟龍)의 자식이니 적제(赤帝)의 아들이니 하며 스스로 높여 왔다. 하지만 어느 시기까지는 그 자신도 별로 믿지 않는 허풍이거나, 터무니없는 자존망대에 지나지 않았다. 까닭 없이 저잣거리 건달들과 시골 현리(縣吏)들이 그 밑으로 꾀어들고, 여공(呂公) 같은 사람이 관상을 핑계로 딸을 바치다시피 하며 사위로 삼을 때도, 속으로는 어수룩한 것들을 한판 잘 속였다는 느낌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역도들의 우러름을 받아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고 다시 패현 사람들의 추대로 현령 노릇까지 하게 되면서 조금 달라졌다. 하늘이 무언가 자신에게 예사롭지 않은 일을 맡기려한다는 막연한 예감이 차츰 구체적인 조짐으로 실감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게 바로 제왕의 길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 뒤 초나라의 별장(別將)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면서 제법 큰 세력을 거느리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천하라도 얻을 것처럼 허풍을 쳤지만 자신은 여전히 그걸 믿지 않았다. 나를 따르면 재수가 좋다, 또는 나중에 뭔가 상당한 게 얻어걸릴 것이다, 정도로 자기의 예사 아닌 행운을 강조하는 뜻에서 어린 날부터 가꾸고 키워온 상징과 신화를 활용해 왔을 뿐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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