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35>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25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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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줄만 남은 法 ⑤

패공이 무관을 넘어 관중(關中)으로 들어온 뒤로 많은 것이 달라지기는 했다. 먼저 관중을 차지하는 장수를 관중왕(關中王)으로 삼겠다는 회왕(懷王)의 약조가 실감되고, 주문(周文) 이후 두 번째로 진나라의 심장부를 들이치는 초나라 장수라는 자부심도 야심의 규모를 키웠다. 그러나 선뜻 천하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 대왕[회왕]의 명을 받들어 관중으로 들어온 한낱 장수에 지나지 않소. 옥새와 부절(符節)은 내가 받을 수 없으니, 잠시 맡아두었다가 우리 대왕께 전하도록 하겠소.”

패공은 그렇게 말하면서 봉함조차 뜯어보지 않고 옥새와 부절을 모두 군영(軍營) 깊숙한 곳에 잘 간직하게 했다. 그리고 진왕 자영을 조용한 곳으로 보내 쉬게 하려는데 한 부장(部將)이 분연히 소리쳤다.

“자영은 창칼로 천하를 하나로 아울러 그 만백성을 학대한 시황제의 핏줄이요, 육국(六國)의 사직을 차례로 짓밟아 우리에게 나라 없는 설움을 겪게 한 진나라의 왕입니다. 마땅히 죽여 부조(父祖)의 한을 풀고, 또한 뒷날의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치러야 했던 어렵고 힘든 싸움에 감정이 격해진 듯했다. 패공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회왕께서 나를 먼저 관중으로 보내신 것은 내가 폭정에 시달린 진나라 백성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으리라 믿으신 까닭이었소. 진왕은 나라를 들어 우리 초나라에 항복하였으니 이제는 왕도 아니고 우리의 원수도 아니오. 너그럽게 싸안아야 할 한낱 힘없는 백성일 뿐이외다. 거기다가 진왕은 또 천명을 알고 스스로 항복해온 사람이오. 이미 항복해온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상서로운 일이 될 수 없소. 우리 대왕께서 이곳으로 납시어 처분하실 때까지 누구도 진왕을 해쳐서는 아니 되오!”

그러면서 자영을 관리에게 맡겨 보살피고 지키게 했다. 평소의 너그러움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처리였다. 진왕(秦王) 자영의 항복을 받는 동안 패공의 정치적 식견과 품격은 자신도 모르게 한 단계 더 성숙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패공은 다음날 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들어갈 때도 한층 성숙된 면모를 보여주었다.

전에도 패공이 이끄는 군사들은 다른 유민군(流民軍)에 비해 백성을 함부로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는 일이 적었다. 그러나 패공의 부드럽고 느긋한 성격에서 비롯된 정도의 차이일 뿐, 그게 반드시 패공의 군사들만 가지는 특징은 아니었다. 그러나 관중으로 들어오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회왕이 항우를 제쳐놓고 자신을 먼저 관중에 들게 한 것은 자신이 관대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해들은 패공은 어째서 회왕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짚어보았다. 그리고 그게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의 행실[無侵暴]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하게 되면서 그때부터는 의식적으로 장졸을 단속하게 되었다. 관중이 적지(敵地)가 되는 진나라 땅이라는 점도 그런 전략적인 배려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함양에 입성하게 되면서 패공의 정치적 감각은 더욱 원숙해졌다. 패공은 그 어느 때보다 엄하게 장졸을 단속하여 터럭만큼도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했다. 자신도 이전과는 달리 힘 있는 장수보다는 너그러운 장자(長者) 같은 인상을 주도록 꾸몄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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