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흑인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 별세…향년 84세

  • 뉴시스(신문)

킹 목사 유지 이어 인권 운동, 2차례 대선 예비선거에 나서기도
2000년 미국 최고 시민 훈장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
전문가 “잭슨, 킹 목사와 오바마 대통령 사이의 도덕적 지도자”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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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가 17일 별세했다고 뉴욕타임스(NYT), CNN 등 언론이 보도했다. 향년 84세

NYT는 잭슨 목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민권운동 시대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 사이 기간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무지개 연합’을 이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인권 지도자였다고 소개했다.

◆ 파킨슨병에 진행성 핵상마비 앓아

유족은 성명에서 잭슨 목사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하면서 사인은 밝히지 않았다.

잭슨 목사는 희귀하고 심각한 신경퇴행성 질환인 진행성 핵상마비(PSP) 치료를 위해 지난해 11월 입원했다고 그가 설립한 ‘레인보우 푸시 연합(Rainbow PUSH Coalition)’이 밝혔다.

그는 2017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잭슨은 1968년 킹 목사 암살 이후 그의 뜻을 이어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언어의 힘과 비범한 에너지, 그리고 야망을 통해 인종적으로 모호했던 시대, 짐 크로우 법이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고 흑인의 정치적 권력이 현실보다는 열망에 가까웠던 시대에 도덕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고 NYT는 평가했다.

그의 ‘희망을 잃지 말라’ 는 호소, 좀처럼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있었던 유색인종과 기타 소외 계층을 포용하는 연합체가 이제 전면에 나서서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비전이었다.

그는 198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민주당 전국대회에서 “나의 지지층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 저주받은 사람들, 상속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탁월한 수사법과 달리 사회 평론가인 스탠리 크라우치는 잭슨 목사에 대해 “그는 자신의 삶을 신화화하려는 고집 때문에 영원히 파멸할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다인종 연합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민주당 진보 진영의 핵심 사상으로 남아 있으며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와 같은 단체에 영감을 주었다.

◆ 흑인 시위대 구타당하는 모습 보고 충격, 인권운동 투신

그는 1941년 10월 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제시 루이스 번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943년 그의 어머니는 찰스 잭슨과 재혼했고 부부에게 아들이 생기자 제시는 오두막집에 사는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친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새아버지에게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며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남부의 계급 제도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동시에 그는 넘치는 에너지, 뛰어난 지능, 그리고 탁월한 운동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식축구 장학금을 받고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 캠퍼스에 입학해 처음으로 짐 크로우법(인종 차별 분리정책)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62년 새해 전날 결혼한 그는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는 1963년 6월 수백 명의 학생들을 도심으로 불러 모은 행진을 이끌다 다음날 체포되 정치적 데뷔를 했다고 NYT는 전했다.

그는 학부 시절 변호사도 고려했지만 목회자의 길을 택해 1964년 대학 졸업 후 시카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1965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흑인 시위대가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신학교 식당 테이블 위에 올라가 다른 학생들에게 함께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하면서 흑인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다.

셀마 사건 발생 6개월 후 학업을 계속하던 잭슨 씨는 24세에 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최연소 직원이 되었다.

1967년경 그는 프로그램을 홍보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뒤 졸업을 6개월 앞두고 신학교 공부를 그만두고 시민권 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나중에 킹 목사 밑에서 일하게 된 후 시카고의 한 교회 목사에게서 안수를 받았다.

킹 목사는 잭슨에게 지적이고 영적인 롤모델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킹 목사와 가장 가까웠던 동료 중 한 명인 랄프 데이비드 애버내시 목사는 “제시는 킹 목사처럼 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잭슨은 킹 목사 측근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지도부의 일원이면서 시카고를 기반으로 거의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의 자만심, 카리스마, 언론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능력은 SCLC 내 다른 구성원들에게 그의 야망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킹 목사와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1968년 4월 킹 목사가 파업 중인 환경미화원들을 지지하기 위해 멤피스를 방문했다가 로레인 모텔 2층 객실에서 총에 맞은 후 달려간 여러 보좌관 중 한 명이었다.

킹 목사 사망 후 잭슨은 SCLC 지도부와 갈등을 빚었던 그는 SCLC의 제도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미국 국내외에서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을 끊임없이 펼쳤다.

◆ 대선에도 두 차례 나서, 예비후보 단계에 머물러

1984년 대선 출마를 결심한 그는 대중 영합적인 선거 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전국 무지개 연합(National Rainbow Coalition)’을 설립했다.

1984년 레바논에서 비행기 격추 후 투옥된 해군 중위 로버트 O. 굿맨 주니어의 석방을 이끌어낸 그의 비공식 세계 순방 외교는 그를 정치적 영향력로 만들었다.

그는 1984년 예비선거에서 게리 하트 상원의원과 월터 F. 먼데일 전 부통령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1988년에 다시 도전했으나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S. 듀카키스가 후보로 지명됐다.

잭슨은 1992년 민주당이 빌 클린턴을 앞세워 백악관을 탈환했을 때 세 번째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아프리카 특사로 임명했고 2000년에는 미국 최고 시민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잭슨 씨는 2017년 11월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이어 파킨슨병과 일부 증상을 공유하는 진행성 핵상마비도 나타났다.

그는 2021년 8월 공화당이 전국적으로 추진하던 투표 제한에 항의하다 워싱턴에서 체포된 활동가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2023년 레인보우 푸시 연합의 대표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으나 집회와 공개 행사에 계속 참여했다.

올해에는 타겟(Target)이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 프로그램을 축소하자 해당 기업 불매운동에 동참했다.

습니다. 재작년에는 위스콘신주 라신을 방문하여 젊은이들의 대선 투표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클레이본 카슨 교수는 잭슨이 두 시대 사이에 끼어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즉, 킹 목사처럼 명백히 영웅적인 인물이 되기에는 너무 늦었고, 버락 오바마처럼 정치 최고위직에서 성공하기에는 너무 일렀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적 지도자보다는 도덕적 지도자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잭슨 목사는 1986년 전두환 정권에 민주화를 촉구하기 위해 방한한 이후 32년만인 2018년 한국을 찾기도 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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