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포츠 산업 노리는 ‘진격의 오일머니’[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1일 0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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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골프, F1…스포츠 산업 향한 전방위 투자
아랍 젊은 리더들, ‘자기 성과 만들기’에 관심 커
‘스포츠 워싱’과 ‘보여주기 이벤트’란 지적도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의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케이스 #1
지난해 12월 19일(현지 시간)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2022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 리오넬 메시의 아르헨티나와 킬리앙 음바페의 프랑스가 맞붙은 이날 경기에서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은 또다른 승자였다. 당시 메시와 음바페의 소속돼 있던 프랑스 리그앙(리그1)의 최고 명문팀 파리생제르맹의 소유주가 카타르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카타르투자청(QIA) 산하 스포츠 투자전문회사인 카타르스포츠인베스트먼트가 파리생제르맹을 소유하고 있다. 타밈 국왕으로서는 자국에서 열린 ‘중동 첫 월드컵’에서 사실상 자신이 구단주인 팀의 ‘월드 스타’ 두 명이 결승에서 경쟁하는 ‘흐뭇한 상황’을 보게 된 것.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가운데)과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 회장(왼쪽)이 지난해 12월19일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에게 우승 트로피를 건네고 있다.  당시 메시는 프랑스 프로축구팀 파리생제르맹 소속이었고, 타밈 국왕은 파르생제르맹(카타르스포츠인베스트먼트가 소유)의 사실상의 구단주였다.  루사일=신화 뉴시스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가운데)과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 회장(왼쪽)이 지난해 12월19일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에게 우승 트로피를 건네고 있다. 당시 메시는 프랑스 프로축구팀 파리생제르맹 소속이었고, 타밈 국왕은 파르생제르맹(카타르스포츠인베스트먼트가 소유)의 사실상의 구단주였다. 루사일=신화 뉴시스

카타르는 스페인 명문 FC바르셀로나에 대한 후원도 카타르재단(카타르 정부가 설립한 교육·문화·과학 분야 지원 비영리재단)과 카타르항공(국영항공사)을 통해 오랜 기간 진행해 온 ‘국제 축구계의 큰 손’이다.

케이스 #2
7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펀드 퍼블릭인베스트먼트펀드(PIF)가 지원하는 LIV 인비테이셔널 골프(LIV)와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DD월드투어(옛 유러피안투어)가 ‘통합’을 발표했다. 세 단체는 통합을 발표하며 “골프란 종목을 전 세계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획기적인 합의를 이뤘다”고 밝혔다.

제이 모너핸 PGA투어 커미셔너는 7일 사우디 국부펀드 PIF가 지원해온 LIV골프와의 합병을 발표했다.  두 단체의 합병을 두고 미국이 최근 관계가 소원해진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국제 프로골프계의 선도적 지위’를 사우디에 양보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AP 뉴시스
제이 모너핸 PGA투어 커미셔너는 7일 사우디 국부펀드 PIF가 지원해온 LIV골프와의 합병을 발표했다. 두 단체의 합병을 두고 미국이 최근 관계가 소원해진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국제 프로골프계의 선도적 지위’를 사우디에 양보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AP 뉴시스

원래 LIV골프와 PGA투어는 앙숙이었다. 지난해 6월 출범한 LIV골프가 ‘오일머니’를 앞세워 더스틴 존슨, 필 미컬슨, 브룩스 켑카 같은 유명 선수를 PGA투어에서 빼갔기 때문. PGA투어는 LIV골프로 넘어간 선수들의 출전을 금지했다. 또 LIV골프는 PGA투어가 반독점법을 위반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극심한 갈등 관계였던 LIV골프와 PGA투어가 통합한다고 하자 미국이 최근 소원해진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우디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통합 발표가 있던 날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사우디를 방문했다. PIF가 새로운 통합 골프 단체의 독점적 투자자란 점도 ‘미국의 사우디 배려’에 힘을 실어주는 근거다.

● 오일머니에 술렁이는 글로벌 스포츠 산업

아랍 왕정 산유국들의 글로벌 스포츠 산업을 향한 진격이 거세다. 현재는 사우디와 카타르의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가 돋보인다. 하지만 막대한 오일머니를 보유한 아랍에미리트(UAE)와 쿠웨이트도 언제든지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사우디는 ‘미스터 에브리싱’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왕세자가 실권을 잡으면서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2018년부터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E’를 열고 있고, 2019년에는 ‘사막의 혈투’로 불린 WBA·IBF·WBO·IBO 복싱 헤비급 통합 타이틀전도 유치했다. 역사는 짧지만 두둑한 상금으로 유명 테니스 선수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디리야 테니스컵’도 사우디가 무대다. 디리야는 수도 리야드에 위치한 사우디 왕가의 발상지로 현지에선 주요 역사 유적지로 통한다.

사우디에서 2018년부터 열리고 있는 포뮬라E 자동차 경주대회. 사우디는 이 경주대회를 왕가의 발상지인 수도 리야드의 디리야에서 열어 큰 주목을 받았다. 아라비안비즈니스 홈페이지 캡처

축구에도 관심이 많다. PIF를 통해 2021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뉴캐슬유나이티드에도 3억 파운드(약 4882억 원)를 투자했다. PIF가 뉴캐슬의 최대 주주가 된 뒤 우수 선수대거 영입 등 파격적인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2021~2022 시즌 11위에 그쳤던 뉴캐슬은 최근 끝난 2022~2023 시즌에서는 단번에 4위에 올랐다. 사우디는 은퇴를 앞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과 카림 벤제마(프랑스) 같은 월드 스타를 자국 프로축구팀에 영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우디는 국제 스포츠 이벤트 유치에도 시동을 걸었다. 이미 2034년 아시안게임(리야드)과 2029년 동계 아시안게임(네옴시티)을 유치했다. 사우디 건국 이래 자국에서 열리는 최대 스포츠 행사가 될 전망이다. 2036년 올림픽 유치를 통해 ‘중동 최초의 올림픽’ 타이틀을 획득한다는 목표도 있다.

최근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사우디와 달리 카타르는 이미 1990년대부터 스포츠 산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카타르는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의 ‘중동 최초 유치’란 타이틀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20일 ‘2022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이 열린 알바이트 스타디움에서 축하 폭죽이 터지고 있다. 카타르 월드컵은 아랍, 중동 최초의 월드컵이다. 동아일보DB
지난해 11월 20일 ‘2022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이 열린 알바이트 스타디움에서 축하 폭죽이 터지고 있다. 카타르 월드컵은 아랍, 중동 최초의 월드컵이다. 동아일보DB

대표적인 건 2022년 월드컵이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도 2019년에 중동 최초로 개최했다. 카타르는 아랍권에서는 처음, 중동권에서는 두 번째로 2006년에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나라다. 그리고 2030년 아시안게임을 다시 유치했다. 중동 국가 중 처음으로 두 번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나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 경기도와 비슷한 크기의 작은 나라가 ‘국제 스포츠 이벤트 허브’란 브랜드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카타르는 2006년 아시안게임을 아랍 국가 중 처음 유치했다. 그리고 2030년 아시안게임도 유치해 아랍 국가, 나아가 중동 국가 중 유일하게 이 대회를 두 번 개최하는 나라가 됐다. 사진은 ‘2006 아시안게임 개막식’. 동아일보 DB
카타르는 2006년 아시안게임을 아랍 국가 중 처음 유치했다. 그리고 2030년 아시안게임도 유치해 아랍 국가, 나아가 중동 국가 중 유일하게 이 대회를 두 번 개최하는 나라가 됐다. 사진은 ‘2006 아시안게임 개막식’. 동아일보 DB

은퇴를 앞둔 유명 축구 선수를 자국 프로리그에 영입하는 것도 중동에서는 카타르가 원조다. 스페인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사비 에르난데스(FC 바르셀로나 감독)와 가비 페르난데스(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코치)가 선수 시절의 말년을 카타르에서 보냈다.

● 젊은 리더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 개선 작업
사우디와 카타르가 유독 스포츠 산업에 적극 뛰어들고 있는 이유로는 국가 브랜드 이미지 개선이 꼽힌다. 교육 수준이 높고, 외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은 젊은 리더들이 나라를 이끌면서 본격적으로 소프트파워 역량 키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것.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왕세자와 타밈 국왕은 각각 38세, 43세다.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나아가 문화콘텐츠 산업 전반에 대한 관심을 키우며 성장한 세대다. 또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자국의 이미지를 바꾸려는 의지도 분명하다.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

이형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국제PR)는 “아랍 산유국의 젊은 지도자들은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에 집중했던 기성세대 지도자들과 구별되는 성과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 중 하나로 국가 브랜드 이미지 개선을 삼았을 수 있다”며 “그동안 국가 차원의 관심이 많지 않았던 분야인 만큼, 새로운 리더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게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스포츠의 경우 결과가 쉽게 확인되고, 국내외에서 동시에 관심을 받는 것도 용이해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적절한 도구”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사우디와 카타르 같은 아랍 산유국들은 오일머니로 큰 부를 축적했지만 △외국인 노동자 인권 문제 △여성 차별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 강조 △극단주의 성향의 무장단체 지원 의혹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천문학적인 돈을 스포츠 산업에 투자할 때마다 전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만 동시에 ‘스포츠워싱(스포츠를 이용한 부정적인 이미지 세탁)’이란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특히 카타르는 2022년 월드컵을 앞두고 자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저임금, 위험한 근무 환경, 열악한 거주시절 등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심층 탐사보도를 통해 “2010년부터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이주 노동자 6500여 명이 카타르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 보여주기식 이벤트? 경제 성장 위한 전략?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의 중‧장기 종합발전 계획인 ‘비전 2030‘을 통해 △탈석유(산업 다각화) △네옴시티 개발 △과학기술 역량 강화뿐 아니라 스포츠와 문화콘텐츠 산업의 육성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석유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는 사우디 경제의 체질 개선을 지향하고, 이 과정에서 스포츠 산업도 키우겠다는 뜻이다.

2019년 카타르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아랍 산유국들은 다양한 스포츠 이벤트 유치 및 투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아랍 산유국들이 얼마나 장기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전략을 가지고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에 나서는 지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많다. AP 뉴시스
2019년 카타르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아랍 산유국들은 다양한 스포츠 이벤트 유치 및 투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아랍 산유국들이 얼마나 장기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전략을 가지고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에 나서는 지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많다. AP 뉴시스

그러나 사우디를 포함해 아랍 산유국들의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와 관심은 여전히 ‘유명 대회나 선수 유치’ 식의 보여주기 조치에 머물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 유치와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활성화 △관련 산업 활성화 등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거의 없다. 예산 및 재정 타당성 분석과 인력 양성 계획도 마찬가지다.

이수정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책임연구원(중동학)은 “아직까지 아랍 산유국들의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는 단순한 국가 홍보 프로젝트 성격에 머물고 있다”며 “지속적인 경제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우디 리야드의 상징 건축물은 ‘킹덤타워’. 사우디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왕세자가 기획한 종합발전 계획 ‘비전 2030’에서도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사우디 리야드의 상징 건축물은 ‘킹덤타워’. 사우디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왕세자가 기획한 종합발전 계획 ‘비전 2030’에서도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사우디와 카타르 모두 글로벌 스포츠 산업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국부펀드를 많이 이용한다. 보통 국부펀드는 안정적이면서, 지속가능한 성과가 나는 투자를 지향한다. 또 체계적인 투자 전략을 강조한다. 하지만 PIF나 QIA가 얼마나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스포츠 산업에 투자하는 지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카타르 도하의 야경.  카타르는 아랍 산유국 중 가장 먼저 대대적인 국가 차원의 글로벌 스포츠 산업 투자에 나선 나라로 꼽힌다. 동아일보DB
카타르 도하의 야경. 카타르는 아랍 산유국 중 가장 먼저 대대적인 국가 차원의 글로벌 스포츠 산업 투자에 나선 나라로 꼽힌다. 동아일보DB

아랍 산유국 국부펀드와 교류해본 경험이 있는 최희남 전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과거보다 투자전략이나 의사결정 구조가 많이 체계화됐지만 여전히 아랍 산유국 국부펀드들은 왕실이나 정부의 주요 프로젝트에는 세밀한 검토 없이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며 “스포츠 산업도 수익성과 성장 가치보다는 왕실과 정부의 관심 사업이라 파격적으로 투자하는 성향이 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아랍 산유국들이 경제 구조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는 해외 기업과 투자 유치를 위해 스포츠 산업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은 “사우디와 카타르 같은 아랍 산유국으로선 개혁‧개방 의지와 소프트파워 역량을 꾸준히 보여줘야 유명 글로벌 기업과 투자 유치에 도움이 된다”며 “일회성 대회 유치나 이벤트 참여가 아니라 지속적인 스포츠 산업 투자는 장기적으로 경제 구조를 바꾸고, 수준을 높이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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