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죽은 오사마 빈라덴, 갑자기 뜬 이유는?[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9일 14시 00분


코멘트

트럼프-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덤 앤 더머’ 듀오

최근 미국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갑자기 소셜미디어 화제어 상위에 오르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왜 9년 전 죽은 알카에다 테러조직 리더가 지금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의 줄임말)’했을까요. 알아본 결과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기자회견에서 빈 라덴을 거론하면서 전국적 화제어로 떠오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미국인들은 “충분히 납득할만하다”는 반응입니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온갖 황당 발언과 돌출행동으로 전국구 조롱거리가 된 인물입니다. 그가 빈 라덴을 언급하며 또 다른 논란을 일으켜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지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코로나 기자회견에서 각종 황당 발언과 돌출행동으로 “플로리다 망신은 주지사가 다 시킨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코로나 기자회견에서 각종 황당 발언과 돌출행동으로 “플로리다 망신은 주지사가 다 시킨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


사정은 이렇습니다. 최근 미국은 코로나 확산 와중에 학교 재 개학 문제를 두고 시끄럽습니다. 플로리다는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지사가 재 개학을 밀어붙이는 상황인데요.

디샌티스 주지사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재 개학은 빈 라덴을 죽이는 것과 같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나중에 “‘재 개학을 위해 보건당국이 빈 라덴을 죽인 네이비실(특수부대)처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 했다”고 부연설명을 했지만 어디 대중의 반응은 그렇습니까. 가장 귀에 쏙 들어오는 단어인 빈 라덴만 기억하지요. 특히 부모들은 “안 그래도 애들 학교 보내기가 찝찝한데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 끔찍하게 사람 죽이는 것에 비유하느냐”고 발끈하고 있습니다.

플로리다 주민들은 화가 날만도 합니다. 미 언론은 플로리다를 두고 코로나19 ‘진원지(epicenter)’라고 부릅니다. 코로나 발생자 수에서 플로리다는 뉴욕을 제치고 캘리포니아에 이어 2위로 올라섰습니다. 인구당 발생률로 본다면 전국 톱입니다. 8월 15일 현재 플로리다 확진자는 57만여 명, 사망자는 9300명 수준입니다.
플로리다는 7월부터 코로나가 급속 확산세를 보이고 있다. 탬파베이타임스
플로리다는 7월부터 코로나가 급속 확산세를 보이고 있다. 탬파베이타임스

코로나19에 취약한 데는 지역적 특성이 한몫합니다. 플로리다는 의료보험율이 15%대로 매우 낮고, 저소득층 의료보조제도인 메디케이드 참여 병원에 대한 보상액을 매년 삭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구 5명당 1명꼴로 65세 이상이다 보니 코로나가 발생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죠.

여기에 더해진 것이 디샌티스 주지사의 무능입니다. 4월 말 미국 대학생들의 봄 방학(스프링 브레이크) 때는 해변 폐쇄 조치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6월 초 전국에서 가장 먼저 술집, 레스토랑을 재개장했습니다. 6월 말 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아닌 권고 조치가 나왔습니다. 이달 초 학교 재 개학 비상명령을 내렸으나 주민과 교사들의 불같은 반대로 주춤하고 있습니다. 교사 노조는 주정부를 상대로 재 개학을 연기하라며 소송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민심과 동떨어진 디샌티스 주지사의 코로나 정책은 트럼프 대통령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재선 전략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는 4월 초 전국 주지사 중 가장 먼저 트럼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에 달려와 백악관 집무실에서 각종 플래카드를 펼쳐놓고 코로나 실적 홍보 ‘쇼’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4월 백악관에서 플로리다의 코로나 방역 실적을 홍보하고 있는 디샌티스 주지사(왼쪽). 이 때만해도 플로리다의 코로나 확산세는 심각하지 않았다. 백악관 홈페이지
4월 백악관에서 플로리다의 코로나 방역 실적을 홍보하고 있는 디샌티스 주지사(왼쪽). 이 때만해도 플로리다의 코로나 확산세는 심각하지 않았다. 백악관 홈페이지

워싱턴 호사가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비전을 충실히 수행하는 디샌티스 주지사를 가리켜 ‘다이내믹 듀오’라고 부릅니다. 그 앞에 ‘덤 앤 더머’라는 단어가 생략된 것이라고 뒤에서 비웃고 있지요.

그런데 이 듀오에서 트럼프 대통령마저 이탈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이달 24~27일 열리는 공화당 전당대회를 플로리다 잭슨빌에 유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공화당 지도부에 “대회 기간 중 마스크 착용 등 코로나 방역조치를 대폭 생략하겠다”는 약속을 한 덕분에 전당대회를 따낼 수 있었죠. 그러나 플로리다의 코로나 위험성을 간파한 트럼프 대통령이 잭슨빌 전당대회를 전격 취소하면서 전국구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하겠다는 디샌티스 주지사의 야심찬 계획에도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 디샌티스 주지사 홈페이지에 크게 실려 있다. ‘덤 앤 더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문제의 사진.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홈페이지
트럼프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 디샌티스 주지사 홈페이지에 크게 실려 있다. ‘덤 앤 더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문제의 사진.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홈페이지

코로나19 시대에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의 신속한 위기대응력과 일사불란한 리더십을 목격한 미국인들은 웬만한 주지사의 활약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후방 지원’만 믿고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는 셈이죠. 물론 그 지원마저도 위태한 지경이 됐지만요. 그 결과로 주지사 지지율은 속절없이 하락하고 있습니다.

플로리다 주민들은 주 정치 시스템이 워싱턴이나 뉴욕처럼 견고하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습니다. 디샌티스 주지사의 후진적 정치 스타일이 그런 열등감을 부채질하고 있지요. 그는 지난해 초 임기 4년의 주지사 직에 당선됐습니다. 남은 시간동안 그가 민심에 다가갈지, 계속 대통령 심중에만 믿고 기댈지 갈수록 흥미로워 집니다.

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