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9일 아사히신문 강연을 1871년부터 유럽을 돌며 문물과 제도를 배운 이와쿠라 사절단 얘기로 시작했다. “142년 전 오늘 이와쿠라 사절단이 베를린에 도착했다. 사절단은 일본의 세계를 향한 열린 자세, 지식욕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 전통은 이 나라(일본)에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총리는 곧바로 과거사 극복에 대한 독일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일본이 가야 할 올바른 자세를 우회적으로 주문했다. 메르켈 총리와 동행해 일본을 방문한 한 독일 기자는 “메르켈 총리가 방문국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 정도로 강한 발언을 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전했다.
○ “화해의 손 잊지 못해”
“우리 독일인들은 많은 괴로움을 유럽과 세계에 안겼지만 세계가 독일인들을 향해 내민 화해의 손을 잊지 못한다. 당시로서는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독일연방공화국’에 국제사회가 큰 신뢰를 보낸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었다. 40년 후 베를린 장벽 붕괴, 동서 대립 종결, 1989년부터 1990년에 걸쳐 독일 통일에의 길이 열린 것도 역시 신뢰가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70년이 지나고 냉전으로부터 25년이 지난 오늘, 독일과 일본은 깜짝 놀랄 발전을 이뤘다. 독일과 일본은 자유롭고 열린 나라와 사회, 진보적이고 규범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질서 속에서의 책임을 져야 할 파트너 국가다.”
30여 분의 연설이 끝나자 총리는 단상에 마련된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진행자로 총리와 마주 앉은 니시무라 요이치(西村陽一) 아사히신문 편집담당 이사가 동아시아의 현재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화해를 위해 어떤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지 질문했다. 총리는 앉은 상태로 길게 답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국제사회는 독일이 아니었으면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던 나치스 시대와 홀로코스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받아들여 줬다. 우선은 독일이 과거와 제대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을 관리하고 있던 연합국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등을 통해 독일이 확실히 과거를 극복하는지를 지켜본 것도 동력이 됐다. 독일과 프랑스 간 화해도 언급하고 싶다. 두 나라를 두고 불구대천의 적, 상속된 적이라는 무서운 말도 있었으나 양국은 한발씩 양보했다. 지금은 우정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이웃나라들의 관용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독일이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역사적 교훈은 국민 스스로 깨쳐야 한다. (독일인인) 내가 동아시아에 조언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평화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해당국의) 노력이라고 본다.”
○ “6자회담, 문제는 북한”
메르켈 총리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유효성과 한일 협조를 묻는 강상중 세이가쿠인(聖學院)대 총장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문제는 북한이지만 이 문제 역시 긴 호흡을 갖는 게 중요하다. 일한 협력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양국이 좋은 관계를 맺기를 희망한다. 독일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가치관과 테크놀로지, 기술력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관계가 더 깊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연구하고 있다는 한 학자가 “언론의 자유가 정부에 위협이 된다고 보나”라고 질문했을 때에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론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30년을 넘게 살았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가족까지 끌려가지 않을까 불안에 떨며 살았다.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없으면 혁신적 상상력이 불가능해져 국가 경쟁력을 잃게 된다. 정부는 시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러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
○ “어릴때부터 기술 즐거움 가르쳐야”
총리는 이날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중대한 사건”이라 말하면서 독일의 원전 폐기 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후쿠시마 사고는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원전은 극단적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독일은 2022년 마지막 원전을 없앤다.”
여성의 이공계 진출에 대해서도 “독일도 이공계에 여성이 적다. 어릴 때부터 기술의 즐거움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길과 관련해 “첫 선거가 제일 힘들다. 많은 사람이 여성으로 괜찮을까 하고 망설였겠지만 일단 내딛고 나면 그게 점점 당연한 일이 된다. 역시 전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장내에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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