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시간 한국인 공격… 외국인혐오 범죄인가 취재 보복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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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현장서도 위협적 행동…한인 교회앞 대로변서 테러…스킨헤드 계획범죄 가능성
러 경찰 미온적 수사 태도…피습 심씨, 생명엔 지장없어

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한국인 유학생 심모 씨(29) 피습 사건은 수법 면에서 과거의 유학생 피습 사건과 크게 다르다.

우선 사건이 발생한 곳은 한국인이 많이 사는 모스크바 신흥주택가의 대로변이었다. 범행 시간도 쉽게 범인의 인상착의가 노출될 수 있는 오후 5시경이었다. 이곳은 외국인 혐오 범죄를 일으키는 러시아 ‘스킨헤드’가 활개를 치는 곳도 아니다.

범죄 수법도 치밀하기 짝이 없다. 범인은 한인교회에서 일요예배를 마치고 나온 심 씨를 미행한 듯 노래방에 들렀다가 나온 심 씨가 교포 자녀들과 헤어지고 여자친구만 남은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특히 범인은 한인교회에서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사로 활동하는 심 씨가 먼저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부모들 차에 태워 귀가시킬 때까지 기다리며 심 씨를 노렸다. 목격자가 범인의 인상착의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도록 뒤에서 목을 감싸고 순식간에 찌른 뒤 달아난 점도 치밀한 계획 아래 이뤄진 범행이란 인상을 준다.

백주현 외교통상부 재외동포영사국장은 8일 이번 사건에 대해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해외 교민들에게 △카지노 지역에 가지 말라 △유흥가에 가지 말라 △조명이 확실치 않은 지역에 가지 말라 △떼를 지어 다녀야 한다는 범죄예방 수칙을 홍보해 왔는데 이번 사건은 그런 지침을 다 지켜도 피할 수 없었다는 것.

○ 범죄 목적 단정은 어려워

사건이 발생한 유고자파드나야는 한국인 중국인 등 외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신흥주택가 지역이다. 한국식당과 노래방 등도 많아 한국교민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모스크바국립대, 러시아민족우호대, 푸시킨언어연구소 등이 가까워 세계 각국에서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온 학생도 많아 지난주에도 키르기스스탄인 1명이 현지 청년에게 살해되는 등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건사고가 종종 발생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 경찰이나 한국 외교부는 최근 잇따르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 피습사건이 특별히 한국인을 겨냥한 타 인종 혐오 범죄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2008년 말 금융위기 이후 다시 활성화된 러시아 극우성향의 스킨헤드의 공격목표는 대부분 구소련 출신의 중앙아시아 이민자들이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지호천 모스크바 한인회장은 “한국인들이 습격당하는 건 중앙아시아인으로 오인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성격이 좀 달라 보인다. 피해자의 아버지인 심상기 씨(60)는 “일요일 한인교회는 교민과 유학생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라며 “한인교회 예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길가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은 한국인을 타깃으로 한 계획적인 범죄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6년 전 유학 와 러시아 국립영화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심 씨가 약 두 달 전부터 KBS 모스크바 지국의 일용직 카메라맨으로 일한 사실도 주목된다. 심 씨는 지난달 15일 극동의 알타이 주 바르나울 시에서 한국인 대학생 강모 씨(22)가 현지 청년 3명에게 집단폭행 당해 사망한 사건을 현장 취재해 뉴스로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 KBS는 “현지에서 취재 도중에도 스킨헤드 복장을 한 현지 청년들이 취재진에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고 보도했다. 스킨헤드가 계획적으로 심 씨를 노렸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2006년 러시아 청년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던 유학생 조모 씨는 “스킨헤드들은 ‘사냥감’을 찾기 위해 한 달이나 특정 외국인의 동선을 파악하며 치밀하게 준비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번 습격의 수법이 최근 러시아에서 발생한 타 인종 혐오 범죄인 키르기스스탄인 살해 사건과 비슷하다”며 “러시아 내 심각한 빈부격차의 박탈감이 외국인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지난해만 71명 사망, 333명 부상

한인 유학생이 러시아 극우민족주의자 또는 타 인종 혐오주의자들의 표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5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0대 한국인 유학생 2명이 흉기에 찔려 부상했고 2007년 2월에는 한국인 유학생 1명이 집단 구타를 당해 치료를 받다 한 달 뒤 숨졌으며 지난해 1월에는 단기 언어연수를 하던 한국인 여대생이 인화성 물질을 이용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6년 10월 최덕근 영사 피살 사건이 발생한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인 대상 테러사건은 진상이 밝혀지거나 범인이 붙잡힌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었다. 지난해에만 타 인종 혐오 범죄로 71명이 사망하고 333명이 부상했는데도 러시아 경찰이 단순 폭행사건으로 분류하고 미온적으로 대처해 왔기 때문이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스킨헤드(Skin head):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처음 쓰인 말로 ‘짧거나 삭발인 머리 스타일’을 말한다. 초기엔 정치 인종 문제와 상관없이 노동자 계층의 하부문화를 뜻했으나, 러시아로 건너가 극단적 외국인 혐오증을 가진 극우민족주의자를 통칭하는 용어로 변했다. 가죽점퍼를 입고 무리지어 다니는 이들은 1991년 옛 소련 붕괴 뒤 경제상황이 나빠지며 급속도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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