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 꺼진 자리…좌절을 거름 삼아 희망 키운다

  • 입력 2009년 9월 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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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1년 세계 중산층 리포트]에필로그: 13개국 100명 인터뷰… 다 못 담은 이야기들

《작년 9월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진 뒤 1년 동안 세계 각국의 중산층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폭풍우를 어떻게 헤쳐 왔을까. 동아일보 특별취재팀 기자 10명이 7월 말부터 5주 동안 13개국에서 10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한 결과 세계의 중산층은 삶의 명암이 크게 엇갈린 가운데 가족을 재발견하거나 기존 정치질서를 부정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문이 막힌 사회초년생의 좌절, 버블이 꺼진 뒤 투자패턴 변화상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국가에선 위기를 기회로 삼아 1등 국민으로 도약하거나 새로운 산업에서 금맥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눈길을 끌었다. 본보가 1일자부터 7회에 걸쳐 게재한 ‘경제위기 1년-세계 중산층 리포트’ 시리즈 취재 과정에서 포착한 인상적인 장면과 기사에 미처 담지 못한 뒷얘기를 정리했다. 》

○ 영국·아이슬란드=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요즘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은 ‘당신, 은행원이지’입니다.” 레이캬비크에서 만난 현지 기자 스반보르 시그마르스도티르 씨(37)는 은행에 대한 아이슬란드 국민의 분노가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수준’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 시내에 있는 한 유명한 은행가 집 담벼락은 시위대들이 뿌려놓은 빨간 페인트로 범벅이 돼 있더군요.

특히 빌린 외화로 집을 샀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에게 은행은 원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엔화 대출을 받았다가 파산 위험에 몰린 올라푸르 가드다르손 씨(46)는 “은행이 내부적으론 크로나화가 하락할 것으로 보면서도 고객에게는 크로나화가 안전하다고 꼬드겼다”며 분노했습니다. ‘부동산 불패(不敗) 신화’가 여전한 한국이 아이슬란드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 스페인=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스페인의 성장은 거짓 성장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리카르 루비오 씨(38)는 경기침체의 원인을 묻자 이렇게 답하더군요. “개인, 기업, 정부 모두 자기 능력보다 더 쓰면서 살았어요. 버블로 성장한 국가에서 버블이 꺼지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스페인 사람들은 은행 빚으로 집을 사면서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환상은 집값이 폭락하면서 처참하게 깨졌죠. 인상적이었던 건 이들이 위기를 ‘남의 탓’보다는 ‘내 탓’으로 돌리며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미국이긴 하지만 스페인 경제도 버블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허점을 키웠다는 거지요. 스페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판하면서도 소비가 균형을 되찾으면 경제가 튼튼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당신, 은행원이지!”가 최고의 모욕
○ 미국=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미스터 홍, 왜 이건 안 물어보나요?” 지난달 20일 오후 10시경, 인터뷰를 끝내려 하자 패트릭 앤터스 씨(40)가 기자를 다그쳤습니다. 미리 e메일로 보낸 질문 중 ‘지난 1년간 돈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3가지는’이란 질문을 왜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여행, 1972년산 폰티액 자동차, 그리고 좋은 집을 포기했어요. 전엔 이런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는 그는 위기를 거치며 득도(得道)라도 한 듯 보였습니다.

건축 일을 하다 실직한 존 데소토 씨(54)는 생활비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는 질문에 “아버지 그림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작고한 부친 라파엘 데소토 씨는 ‘펄프 아트’의 대가였답니다. 지난해 그림 한 점이 15만 달러에 팔렸을 정도입니다. 5월에 해고됐으면서도 여유가 넘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 일본=김창원 도쿄 특파원 changkim@donga.com

“10년 뒤 노후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일본 총선을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도쿄 이케부쿠로(池袋)역 앞 유세장에서 만난 나카무라 아사코 씨(46·주부)는 온통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 차 보였습니다.

종신고용의 전통 속에 ‘국민 1억 명 총중산층’을 자랑하던 일본도 이번 경제위기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근로자 3명 중 1명은 비정규직 사원이고 월급마저 깎였습니다. 지난 1년간 일본 국민이 실감한 ‘바꾸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함이야말로 사실상 첫 번째 정권교체라는 이변의 원동력이었습니다.

○ 폴란드·헝가리=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사치할 돈은 바라지 않아요. 남편이 좋아하는 산을 한 달에 한 번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여유만 있었으면 해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만난 은행원 엘지비에타 파스테르나크 씨(40·여)의 소망은 소박했습니다. 평지가 많은 폴란드에선 등산을 하려면 산악지방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휘발유값과 식사비가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파스테르나크 씨는 자신과 남편의 급여가 크게 줄어 아이 앞으로 부은 적금을 깨 생활비에 보태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생활비를 아끼려고 한 달에 한 번 남편의 머리카락을 직접 다듬고, 본인은 1년에 한 번 미용실에서 커트를 한다고 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 씨의 소박한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합니다.

노후연금은요? 우리 아이 미래는?
○ 독일·네덜란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 ‘에이즈 아우프클라우’의 상임간사 카트린 크라우제 씨(40·여)는 요즘 기업인들을 찾아다니기에 바쁩니다. 20년 역사의 전통 있는 시민단체가 재원 부족으로 문 닫을 위기에 처했거든요.

경제위기로 직격탄을 맞은 곳은 바로 이런 자선기부단체입니다. 크라우제 씨가 기자에게 보여준 통계에 따르면 아우프클라우의 가장 큰 재원인 기업 기부는 경제위기 이후 68%나 줄었습니다. 그는 “경제위기가 기부나 자선을 ‘배부른 소리’로 생각하게 만든 것 같다”며 씁쓸해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올 상반기 대기업의 기부금 지출이 1년 전보다 10∼20% 줄었다고 합니다. 크라우제 씨의 사연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 브라질=문병기 기자 weapon@donga.com

지난달 15일 오후 브라질 상파울루 대성당을 지나던 기자의 눈에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를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형광색의 금은방 광고판을 뒤집어쓰고 피켓을 든 모습이 피에로를 연상케 했습니다.

조제 마누엘 씨(46). 스페인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다 4년 전 사업차 브라질로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2년이 채 되지 않아 망했고 그는 지금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됐죠. 하루 8시간씩 광고판을 뒤집어쓰고 받는 돈은 고작 월 500헤알(35만 원) 정도. 그래도 ‘기회의 땅’ 브라질을 떠날 생각이 없답니다.

그를 보며 서유럽의 고민과 신흥국의 희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소득수준이 높지만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이 재기를 모색하기 힘들 만큼 역동성을 잃었다고 합니다. 반면 브라질엔 글로벌 경제위기 후에도 수많은 사람이 기회를 찾아 몰려들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세계 경제는 이렇게 숨 가쁘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중동 20억 인구 고객으로 맞을 준비 끝

○ 중국=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왕량(王亮·31) 씨는 베이징대, 칭화대와 함께 중국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푸단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유명 외국계 회계법인의 기업 인수합병(M&A) 부서에서 일하는 엘리트입니다. 왕 씨에게 중국의 미래를 묻자 “갈 길이 한참 남았다”고 답하더군요. 기자가 세계 양대 강국으로 미국과 중국을 지칭하는 ‘G2’란 표현을 쓰자 황당하다는 듯 웃기도 했습니다.

그는 “적어도 수십 년 안에는 미국 같은 대국의 지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며 “솔직히 일본과 한국을 능가하기도 쉽지 않을 걸로 본다”고 했습니다. 또 “삼성, LG, 현대가 있는 한국이 부럽다”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성공에 취하기보다 자세를 낮추고 자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젊은 엘리트의 모습이 중국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랍에미리트=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지난달 18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헬스케어시티에서 기자는 단지 내 건설현장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외국인임을 알아본 시민들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올해 말 완공되는 하버드대병원 두바이센터입니다. 세계 유명 병원이 모두 두바이에 들어온대요”라며 자랑하더군요.

두바이 정부는 중동의 의료허브로 거듭나기 위해 대대적으로 의료산업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 헬스케어시티입니다. 이곳에 입주한 의료기업 사장 압둘 살람 알 마다니 씨(50)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4시간 비행 거리 안에 20억 인구가 있다”며 “두바이는 세계적인 의료 허브가 될 준비를 모두 마쳤다”고 자신했습니다. 두바이는 경제위기 이후 부동산 값이 폭락하면서 ‘사막의 기적’이 아니라 ‘신기루’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죠. 하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두바이 지도층의 창의력과 국민의 도전정신은 여전했습니다. 1년 뒤 두바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 인도=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인도를 ‘잠자는 코끼리’라고 놀리지요. 하지만 지금 인도는 잠에서 깨어났어요. 이제 이 코끼리가 일어나 뛸 겁니다. 미국도 따라잡을 거예요.” 자동차 판매회사 지점장인 라빈더 세드 씨(54)는 자국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로벌 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성장세를 구가하는 인도 경제에 전 세계가 경탄과 찬사를 보냅니다. 자동차 내수 판매가 급증하면서 세드 씨의 봉급도 매년 10∼15% 오르고 있죠. 그는 “우리 회사의 전체 고객 중 50%는 생애 처음 차를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차를 처음 사는 사람들은 월소득 25만 원 안팎으로 인도에서 중산층이나 그 아래 계층에 속하죠. 한국인의 소득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수억 명에 이르고 앞으로 더 늘어날 거라고 생각해 보세요.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그의 장담이 허풍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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