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유럽헌법 부결…‘하나의 유럽’ 꿈 주춤

  • 입력 2005년 5월 31일 03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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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이 국민투표에서 선택한 유럽헌법 반대는 예상된 결과였다. 유럽 통합으로 얻게 되는 경제적 이득보다 손실이 크다는 의견과 유럽헌법 채택 시 프랑스의 정체성이 약해진다는 불안감이 반대 여론을 부추겼다. 이번 투표 결과로 프랑스에선 내각 재구성을 비롯한 정부와 정치권의 재편이 예상되며 유럽연합(EU)은 통합 계획에 큰 차질을 빚는 등 유럽 전체가 큰 여진을 맞게 될 전망이다.》

▽부결 원인은=지난해 10월 EU 정상들이 헌법안을 채택한 직후만 해도 프랑스 국민의 60%가 찬성했다. 그 뒤 지지율이 내리막길을 탄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기 때문.

10.2%에 이르는 실업률에 신음하는 프랑스 유권자들은 헌법안 통과로 동유럽권의 값싼 노동력이 대거 유입될 것을 우려했다. 무한경쟁의 미국식 자본주의가 도입될 경우 농업보조금, 연금제도 같은 프랑스식 사회보장제도가 훼손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높아졌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EU 가입을 바라지 않는 것도 주된 반대 이유 중 하나였다.

게다가 이번 투표가 현 정부에 대한 신임투표로 성격이 변질되면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 대한 낮은 지지도가 부결의 큰 원인이 됐다.

▽프랑스 국내의 정치적 파장=프랑스의 정치 지형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내각 개편이 바로 실시돼 인기가 없는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의 교체가 확실시된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3선을 노리는 시라크 대통령의 꿈은 물 건너 간 것으로 평가되며 이제부터 레임덕 현상에 시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헌법 반대파인 극우와 극좌계열 정당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반면 지도부가 찬반으로 분열됐던 집권여당 대중운동연합(UMP)과 제1야당 사회당은 심각한 후유증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EU의 정치적 통합은=60년에 걸쳐 경제적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뤄 온 EU로서는 이번에 유럽헌법이 좌초 위기에 처하면서 당분간 정치적 통합을 위한 ‘대약진’은 주춤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간의 경제 통합 등의 성과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며 EU의 일상 업무는 2000년 체결된 니스 조약에 따라 진행된다.

EU 대통령과 외무장관직 신설, 표결 방식의 변화, 유럽의회의 권한 강화 등 정치적 통합력 강화를 통한 ‘유럽합중국’을 향한 발걸음이 늦춰지게 되는 것. 경제적 측면에서도 역내 서비스 이동의 자유화 등 전면적인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지연되면서 유럽 경제의 침체도 예상된다.

EU의 위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통합을 지향하던 EU는 여러 차례 각국의 조약 부결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향 전환과 재투표 등으로 난관을 극복해 왔다. 1992년과 2001년 덴마크와 아일랜드가 각각 EU 관련 조약 비준을 부결했다가 2차 투표로 가결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 따라서 다음 달 16일 개최되는 EU 정상회의에서 △재투표 △재협상 △속도 조절 등 유럽헌법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놓고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유럽헌법 국가별 비준 현황

비준한 나라(9개국)비준 앞둔 나라(15개국)부결된 나라(1개국)
국민투표스페인네덜란드(6월 1일) 룩셈부르크(7월 10일) 덴마크(9월 27일) 폴란드(9, 10월 중) 포르투갈(10월 중) 영국(내년 초) 체코(내년 중순) 아일랜드(미정) 프랑스
의회표결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그리스 오스트리아 독일벨기에(5월 말) 라트비아(6월) 키프로스(6월 30일) 몰타(7월 중) 스웨덴(12월 중) 핀란드(내년 초) 에스토니아(미정)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네티즌, 헌법 허점 유포 반대여론 이끌어▼

29일 오후 10시 투표 종료와 함께 여론조사 기관의 출구조사 결과가 일제히 발표되자 프랑스 전역은 환호와 탄식으로 엇갈린 표정이었다.

○…반대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승리가 확실시되자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고 있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수천 명으로 불어나 광장을 가득 메웠다. 반대파들은 “유럽헌법은 죽었다. 더 이상의 유럽헌법은 없다”면서 자동차 경적을 울리며 승리를 자축했다.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직후 정치권 인사들은 잇따라 성명을 발표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유럽 내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키는 일이 힘들게 됐다”며 우려했다. 반대 여론을 주도한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 당수와 우파 정당인 프랑스운동의 필리프 드 빌리에 당수는 “시라크 대통령이 도박을 원했지만 그는 패배했다”면서 시라크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투표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운 이웃 국가의 지도자들은 우려를 표시하면서도 유럽헌법 비준 절차는 계속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달 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네덜란드의 얀 페테르 발케넨데 총리는 자국 국민에게 “프랑스의 결과에 상관없이 소신껏 투표에 임해 달라”고 촉구했다.

반면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인 로마노 프로디 씨와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는 “유럽은 프랑스 유권자들이 던진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젊은이들이 대거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번 투표 결과에 인터넷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한 전문가는 “정부가 헌법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리지 않은 상황에서 누리꾼(네티즌)들이 헌법의 허점을 인터넷에 유포해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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