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탄생 100주년]“덩동지의 통치는 살아있다”

  • 입력 2004년 8월 22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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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이 7년 전 사망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추모 열기로 뒤덮였다. 지난해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추모 분위기는 22일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베이징(北京)의 심장부인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기념식으로 절정에 올랐다. 때맞춰 중국 올림픽 대표팀의 승전보가 연일 전해지면서 중국 전역이 열광하고 있다.》

▽추모 열기=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식은 후진타오(胡錦濤)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 중앙군사위 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참석해 그야말로 거국적으로 진행됐다.

후 주석은 이날 “덩샤오핑 동지는 중국 경제개혁의 설계사이며 전 생애에 걸쳐 인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그는 아울러 공산당의 집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평화 외교정책을 고수하겠다고 강조했다.

신화통신, 인민일보, CCTV 등 관영 언론매체들은 이달 들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덩샤오핑을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영화 ‘1928년의 덩샤오핑’도 개봉됐다.

후 주석과 원 총리는 최근 덩샤오핑 생가가 있는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을 방문했고, 장 주석도 최근 제막된 덩샤오핑 흉상에 친필을 남겼다.

▽왜 지금 덩샤오핑인가=무엇보다 지금의 중국이 덩샤오핑이 생전에 마련한 설계도대로 거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다.

건국의 아버지는 마오쩌둥(毛澤東)이지만 중국을 잘 살게 만든 실질적 국부는 덩샤오핑이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덩샤오핑은 죽어서도 사실상 중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민중을 먼저 생각한 인물인 데다 이름처럼 ‘작고(小) 평범한(平)’ 처신을 한 최고지도자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킴으로써 국민 결속을 강화하려는 당 지도부의 뜻도 담겨 있다. 중국은 현재 도시와 농촌간의 빈부 격차와 갈등이 갈수록 심화돼 사회주의의 강점이었던 일사불란한 사회통합이 위협 받고 있는 상황이다.

1978년 문화혁명 세력을 누르고 집권한 덩샤오핑은 자신의 통치철학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길을 열었다.

특히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1992년 2월 경제가 가장 발달한 선전(深(수,천)), 상하이(上海) 등을 돌며 과감한 개방 정책을 촉구한 ‘남순강화(南巡講話)’는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온 주춧돌로 평가된다.

덩샤오핑이 개혁을 시작한 1979년 중국의 국민총생산(GNP)은 3370억위안(약 407억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11조6694억위안(약 1조4093억달러)으로 35배가 됐다.

그러나 이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톈안먼 사건 무력진압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숙제로 남아 있다.

▽‘정략’ 시각도=중국 당국이 덩샤오핑 추모 열기 확산에 적극 나선 또 다른 이유는 장 주석과 후 주석간의 갈등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장 주석측은 자신에게 권력을 넘겨준 덩샤오핑을 부각시켜 자신의 존재를 인민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반면, 후 주석측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한층 부각시킴으로써 구시대 인물 제거의 방편으로 삼기 위해 추모열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외신들의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중국 TV의 특집은 덩샤오핑이 미련 없이 권력을 이양한 부분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1989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의 마지막 권력 보루인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장쩌민에게 물려주었다. 장쩌민이 당 총서기에 오른 지 불과 5개월 만의 일이었다.

당 총서기를 후진타오에게 넘기고도 2년 가까이 군사위 주석을 양보하지 않는 요지부동의 장쩌민으로선 껄끄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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