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그후 1년]<6>‘동반과 견제’ 新국제질서

  • 입력 2002년 9월 5일 18시 35분



《‘이제 세계는 9월 11일 이전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

지난해 9·11테러 직후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는 다가올 국제질서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면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잠재적 경쟁자였던 러시아와 중국이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지도력을 확보했다. 전통적으로 국제정치무대에서 미국과 대칭점을 이뤄왔던 두 나라의 영향력은 희미해져 갔고, 유럽연합(EU)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부재(不在)’를 확인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특히 중국의 군사전문가들은 현 국제상황을 ‘냉평화(冷平和)’로 규정하면서 미국이 ‘양양(兩洋)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본다. 대서양에서는 NATO의 확장을, 태평양에서는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과 미일(美日)동맹 강화로 미국이 최정점에 서는 국제질서를 고착시키면서 중국과 러시아 등 대륙세력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 EU 또한 9·11테러 이후 1년 동안 미국의 일방적 대외정책이 다른 나라의 환멸을 키워 지구적 연대를 훼손시켰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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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테러戰명분 간섭 冷평화시대 초래”▼

“국제평화와 안보는 어느 한 국가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테러와의 전쟁은 유엔 헌장과 국제 관례에 따라 수행돼야 한다.”

6월 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4개국 정상들은 세계의 다극화와 국제안보 문제에 대한 기존질서 유지를 재삼 강조하고 나섰다.

9·11 테러 이후 가속도가 붙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 행태와 국제전략질서 재편 움직임에 제동을 걸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은 회의 1주일 뒤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의 탈퇴를 선언했다. 냉전기 세계 전략 균형의 초석이었던 ABM 협정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미사일방어(MD)계획의 강행을 위해 국제안보의 ‘터부(금기사항)’마저 깬 미국의 조치는 일방주의 외교의 극치였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한 미국의 세계전략질서 재편 움직임에 가장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는 것은 중국이다. 조지 W 부시 공화당 정권 출범 이후 미국에서는 ‘중국 위협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의 ‘2015년 세계전망’(2000년 12월)과 국방부의 ‘4개년 국방정책 검토(QDR)’ 보고서(2001년 9월말)에서 “세계의 다극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2015∼2020년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것이지만 중국은 이에 도전할 가장 강력한 잠재 적국”이라고 규정했다.

뤼유성(呂有生) 국방대학원 교수 등 중국 군사전문가들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전략의 중심축을 아시아로 옮겨오고 있으며 중국에 대한 ‘신(新)간섭주의’ 정책을 펴고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최근 전통적 동맹국인 일본과 한국은 물론 인도, 호주 등 태평양 국가와의 안보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괌 등지에 대한 미군 주둔과 미사일 및 전략폭격기 배치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중국은 미국과의 협력 및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평화적 주변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은 앞으로 20∼30년간 미국과의 대립보다는 총체적인 국력 신장에 박차를 가해 미국과의 힘의 격차를 좁히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중국 군사전문가들은 이를 병법서인 육도삼략을 빌려 ‘타오광양후이(韜光養晦)’전략이라고 즐겨 표현한다.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재능을 감추고 능력을 기른다’는 것이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EU…“군사-경제력 키워 美 일방적 외교 제동을”▼

“광기는, 그것이 비록 절망에서 비롯됐다 해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

9·11테러 다음날인 지난해 9월12일 프랑스 권위지 르몽드의 1면에는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란 칼럼이 실렸다. 장 마리 콜롱바니 사장이 직접 쓴 이 글은 미증유(未曾有)의 본토 공격을 당한 미국인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적극적인 연대감을 표시했다.

1년이 지난 오늘, 그 같은 연대감은 자취를 감췄다. 반대로 미 국무부가 최근 대책회의를 열어야 할 정도로 반미감정이 세계에 퍼져 있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 수행을 협조 묵인했던 나라들은 대 이라크전 개전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노(No)’라고 말한다. 셀릭 해리슨 미국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의 표현대로 ‘미국 의 외교정책을 수행하는 효율적인 수단의 하나’였던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까지 고개를 가로젓는다.

도대체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미국의 LA타임스는 1일 “9·11테러 이후 1년 동안 미국의 일방적 대외정책은 다른 나라의 환멸을 키워 지구적 연대를 훼손시켰다”고 지적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토머스 캐로더즈는 “9·11테러는 그렇지 않아도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는데 익숙한 조지 W 부시 행정부 멤버들에게 훌륭한 명분을 주었다”고 말했다. “미국 편에 설지, 말지를 결정하라”고 강요한 부시 대통령의 연설은 이 같은 일방주의(Unilateralism)의 극치라는 것.

여기에 미국의 신보수주의 학자들은 “오늘날 유럽이 ‘칸트류의 영구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미국이 야수들이 우글거리는 홉스류의 세계로부터 유럽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라며 미국식 일방주의에 이론적 토대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미국의 일방주의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인구와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을 앞서는 유럽연합(EU)이 대안 세력으로 부상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EU 15개국의 연간 국방비 합계는 1300억달러(약 150조원). 한해 3000억달러(약 350조원)를 쏟아붓는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아프간 전쟁 때 유럽 군사력은 미군의 작전 수행에 거치적거린다며 사실상 배제됐다.

미국 군사력의 일방적 지위에 변화가 없는 한 외교의 일방주의를 비난하는 게 공허하다는 자성론 또한 유럽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AFP통신은 최근 9·11테러 1주년의 ‘승자와 패자’를 선정하면서 유럽 군사력의 주축인 NATO를 ‘잊혀진 자’로 지목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러시아…“중앙亞 넘보다니…”힘겨루기 본격화 ▼

러시아와 미국은 9·11 사태를 계기로 어느 때보다도 밀접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잦은 정상외교는 ‘미-러 신(新) 밀월시대’를 열었다는 언론의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이런 변화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민영 NTV는 지난해 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작전이 종결되자 이 전쟁의 승자(수혜자)와 패자(피해자)를 구분하면서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승자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에서는 과연 이 같은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느냐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은 2일 “러시아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데 대해 뒤늦게 제동을 걸고 나선 것.

푸틴 정부는 ‘국제질서의 다극화 추구’라는 러시아 외교의 핵심 원칙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1년 동안 외교적 양보를 계속해 왔지만 미국은 이른바 ‘악의 축’ 국가들에 대한 강경정책과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의 일방적 탈퇴 등에서 보듯이 ‘힘의 외교’를 밀어붙여 왔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가장 아파하는 것은 앞마당인 중앙아시아에 미군을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러시아 세력권이었던 이 지역에 처음 발을 디딘 미군은 대(對)테러작전이 종료됐음에도 장기 주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완충지대 없이 미군과 직접 대치하는 상황에 놓이게 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장에 못지않은 안보 위협을 느끼게 됐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전략 요충지인 이 지역에 배치된 미군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도까지 압박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는 석유 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경제적 잠재력 때문에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 등 이 지역 국가들의 ‘탈(脫)러-친(親)미’ 움직임까지 가속화되면서 러시아는 미군의 중앙아시아 주둔이 영구적이지 않도록 막는 데도 급급한 형편이 됐다.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의 칸트 기지에 독립국가연합(CIS)군 병력을 파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 공군기지에는 미군 등 서방측 다국적군 2000여명이 주둔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 미-러의 힘 겨루기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그동안 국제정치 무대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미-러 양국의 각축은 9·11 이후 달라진 미국의 세계전략과 이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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