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국 리더십 집중분석/프랑스]국익 앞에선 '한마음'

  • 입력 2001년 8월 15일 18시 42분


지난 달 16일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비가 오는 가운데 치러진 프랑스 혁명기념일(7월 14일) 행사에서 서로 노려보는 사진을 1면에 큼지막하게 실었다. ‘비가 온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에서는 폭풍이 몰아친다’는 사진 설명과 함께.

요즘 프랑스 언론의 관심사는 단연 시라크 대통령과 조스팽 총리의 불화다. 연일 ‘우파 대통령과 좌파 총리의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동거) 정부가 붕괴 위기에 처했다’는 등의 기사가 지면을 차지한다.

내년 대선 출마가 확실시되는 최대 라이벌인 두 사람은 상대를 향한 직설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요즘 격돌하고 있다. 시라크 대통령의 비자금 파문과 조스팽 총리의 트로츠키파 활동 전력(前歷)이 드러나면서 상대방에 대한 비난전도 점점 가열되고 있다.

정치적 신념 등 여러 측면에서 물과 기름 같은 대통령과 총리가 국정의 두 기둥을 이루고 있는데도 프랑스가 최근 몇 년 동안 서유럽 국가 중에서도 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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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도 프랑스 경제는 우파와 좌파가 ‘동거 정부’를 구성한 97년부터 호전됐다. 당시 13%에 육박했던 실업률은 현재 10년 만의 최저인 9%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은 독일과 영국에 앞선 3.5%였고 인플레는 제로에 가까웠다.

지난해 세수 잉여도 800억프랑(약 136조원)이나 돼 정부가 돈 쓸 곳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상황이다. 최근 세계경제의 전반적인 둔화에 따라 프랑스 경제도 다소 주춤하는 기세지만 영국과 독일에 비해서는 훨씬 느긋한 편이다.

우파 대통령과 좌파 내각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어떻게 이런 호성적이 가능했을까. 많은 프랑스 전문가는 “프랑스 정치인들이 정쟁은 하되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97년 5월 총선에서 좌파 연합이 승리하자 시라크 대통령은 좌파인 사회당 조스팽 당수를 총리로 지명했고 조스팽 총리는 좌파 일색의 새 내각을 꾸몄다. 이로써 프랑스 제5 공화국 세 번째 동거 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프랑스는 경기침체와 재정적자, 만성적인 실업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한 좌우 동거와 좌파 내각의 사회복지 우선 정책이 경제를 더 나쁘게 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었다.

그러나 동거 정부는 그 같은 우려를 비웃듯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조스팽 총리는 전통적인 좌파 정책에서 벗어난 유연한 정책으로 호황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 같은 결과는 갈등하고 반목한다 하더라도 ‘판’을 깨지 않는 프랑스 정치 풍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스팽 총리는 5월 사회당 초선인 아르노 몽트부르 의원이 시라크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자 앞장서서 말렸다. 탄핵안이 대선 라이벌인 시라크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 공세로 비쳐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국익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흔쾌히 협력하는 프랑스 정치의 전통도 좌우 동거를 뒷받침하는 토양이다. 안에서는 찬바람이 도는 시라크 대통령과 조스팽 총리이지만 유럽연합(EU) 정상회의 같은 대외 행사에 참석하면 서로를 치켜 세우기에 바쁘다.

동거 정부의 성공 때문인지 최근 여론조사는 응답자의 65%가 동거 정부가 내년 대선 때까지 유지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동거에도 분명한 원칙이 있다. 동거는 하되 융합하지는 않는다는 것. 선거 또는 집권을 위한 한국식의 합당이나 연합은 프랑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서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가는 것이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점은 프랑스 동거 정부가 역설적으로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정성배(鄭成培) 파리 사회과학대학원 명예교수는 “프랑스 헌법은 외교와 국방은 대통령이 책임지고 나머지 내정을 총리가 주도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좌우 동거라는 불편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대통령과 총리가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있고 대통령은 내각이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설명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phark@donga.com

▼르무엔의원 "동거정부 절대권력 존재할 수 없어"▼

조르주 르무엔 프랑스 사회당 하원의원은 “동거 정부는 프랑스 민주주의의 독특한 산물로 오늘날처럼 정착되기까지는 수많은 곡절을 겪었다”고 말했다.

르무엔 의원은 파리의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와 만나 프랑스의 리더십에 대해 설명하며 “민의를 존중하고 갈등 소지를 예방하기 위해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하는 것이 동거의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동거 정부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동거 정부가 되면 자동적으로 정치 세력간에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진다. 이는 절대 권력에 대한 견제를 추구하는 프랑스 헌법의 이념에도 부합된다. 권력을 한군데 몰아주기 싫어하는 프랑스 국민의 정서와 맞는다는 것도 중요하다. 프랑스식 민주주의 체질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단점이 있을 텐데….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헌법상 대통령은 국가 통합 및 국방 외교를 책임지고 총리가 내정 일반을 맡도록 역할이 분리돼 있지만 충돌이 없을 수 없다. 지난달 14일에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 혁명 기념일 기자회견에서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이끄는 내각을 비난하기도 했다. 마치 한발로 자동차 가속 페달을 밟고 다른 발로 브레이크를 밟을 때처럼 덜컥거릴 때가 있기는 있다.”

-좌우파가 동거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민의를 존중하는 것이다. 97년 총선에서 패배한 시라크 대통령의 유일한 선택은 동거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동거 정부 구성을 거부했다면 그는 하야를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아울러 대통령과 내각이 국정을 효율적으로 분할 운영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돼야 한다.”

-7년이던 프랑스의 대통령 임기가 내년에 당선되는 대통령부터 5년으로 줄어든다. 내년에 대선과 총선을 함께 치르면 동거 정부가 다시 탄생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 아닌가.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에서 대선과 상반된 총선 결과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지금도 시라크 대통령이 51% 대 49%로 조스팽 총리를 리드했다가 다음날 49% 대 51%로 역전되는 상황이다. 97년 시라크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했을 때도 모든 여론조사가 총선에서 우파의 승리를 점쳤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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