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표류하는 조난자… 구원의 해안 도달하길”[손효림의 글로벌 책터뷰]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1월 10일 01시 40분


환상 모험 은유로 빚어낸 매혹적인 이야기
연극 보며 ‘정말 내가 썼나’ 놀라워
배우가 무대에서 동물인형 조종에… 본질은 인간 손으로 무언가 하는 것
트로이 전쟁 재해석 소설, 3월 출간… 그리스군, 성벽 앞에 10년간 진 쳐
삶은 승자 없는 기다림과 교착 상태… 문학은 고통 직시하고 견디게 해 줘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호랑이와 구명 보트에 남겨진 파이(박강현·왼쪽)는 호루라기를 불며 호랑이와 맞서며 길들인다. 호랑이 인형(퍼펫)을 조종하는 배우가 무대에 드러난다. 에스앤코 제공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호랑이와 구명 보트에 남겨진 파이(박강현·왼쪽)는 호루라기를 불며 호랑이와 맞서며 길들인다. 호랑이 인형(퍼펫)을 조종하는 배우가 무대에 드러난다. 에스앤코 제공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 원작 소설
얀 마텔
폭풍우로 배가 침몰해 227일간 망망대해를 떠돌며 보트에서 호랑이와 사투를 벌이는 인도 소년 파이. 포효하며 달려드는 호랑이는 야생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배우들은 인형(퍼핏)으로 만든 호랑이를 실감나게 구현한다.

현재 공연계에서 최고 화제작으로 꼽히는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다. 가족을 잃고 거대한 두려움이 덮치지만 믿음을 갖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파이를 통해 삶을 묵직하게 성찰한다. 황홀함과 먹먹함도 선사한다. 2002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리안 감독이 만든 동명 영화(2013년)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소설을 쓴 캐나다 작가 얀 마텔(63)을 최근 e메일 인터뷰했다. 연극을 봤다는 작가는 “신기하고 낯선 경험이었다”고 했다.

● “경이롭고 놀라운 무대”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는 2019년 영국에서 처음 선보였다. 국내 초연(서울 강남구 GS아트센터)에선 배우 박정민 박강현이 파이 역을 맡았다. 얀 마텔은 소설이 영화, 연극으로 변주된 데 대해 놀라워했다.

“작고 검은 글자로 된 책이라는 물건이 가진 힘과 경이로움이 전면에 드러나는 무대였어요. 영화도 마찬가지였고요. 책은 독자가 읽기 시작하면 숨겨져 있던 마법이 비로소 드러나잖아요. 연극와 영화는 완전히 다른 세계예요. 연극을 보며 ‘내가 정말 이걸 썼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이 한국(국내 출간 책 제목은 ‘파이 이야기’)을 비롯해 50개국에 출간된 데 이어 영화, 연극으로도 제작돼 여전히 큰 호응을 받는 이유는 뭘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호랑이와 홀로 구명보트에 남겨져 표류한 소년이라는 은유가 울림을 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조난자입니다. 저는 책에 사인해 드릴 때 종종 ‘멕시코 해안에 도달하시길’이라고 씁니다. 멕시코 해안은 파이가 마침내 도착한 곳이죠. 어떤 깨달음이나 구원에 이르길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태평양을 건너 의미라는 해안에 닿고 싶어하는 존재니까요.”

얀 마텔은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날로그적 연출이 재조명받는 걸 반기며 “인간이 직접 해내는 것을 통해 본질에 가 닿고 서로 연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Emma Love
얀 마텔은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날로그적 연출이 재조명받는 걸 반기며 “인간이 직접 해내는 것을 통해 본질에 가 닿고 서로 연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Emma Love
연극에선 호랑이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같은 인형을 조종하는 배우들이 무대에 그대로 드러난다. 첨단 기술이 각광받는 시대에 아날로그적 연출이 재조명받고 있다.

“저는 아날로그를 사랑합니다. 기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본질적인 건 우리가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과 연결됩니다. 인공지능(AI)이 발전해도 개성은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 “사는 건 기다림을 배우는 것”

그는 3월 말 새 장편소설 ‘Son of Nobody(선 오브 노바디)’를 출간한다. 국내에는 올 하반기(7~12월)에 나올 예정이다. 트로이 전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이 전쟁에 참전한 병사 이야기와 현대 캐나다인 학자 이야기가 교차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가 깊이 와닿았습니다. 트로이 전쟁은 본질적으로는 포위전이었습니다. 그리스군은 트로이 성벽 앞에서 무려 10년을 기다렸죠. 오랜 기다림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방향도, 행동할 방법도 알려주지 않아요. 권태로움과 좌절감이 깊어지죠. 기이한 생각과 분노를 키워 극단적인 폭력이 터져 나오게 만들고요. 영화 ‘기생충’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현대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사는 법을 배운다는 건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거니까요. 우리는 모두 트로이 성벽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 시선에서 트로이 전쟁을 그린 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평범한 인간의 운명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데아 출신 병사 프소아스는 염소를 치고 치즈를 만들며 그저 살아가려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아가멤논 왕보다는 대부분 프소아스에 가깝습니다.”

그는 현대를 사는 우리 역시 각자의 트로이 전쟁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승리에 관한 게 아닙니다. 인생에는 진정한 승리가 없어요. 좋은 성적을 받거나 승진할 수는 있겠죠. 상을 받거나 복권에 당첨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은 결국 모든 것을 삼키고 죽음은 모든 걸 앗아갑니다. ‘이긴다’는 건 뭘까요? 연합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수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대부분의 전쟁 그리고 대부분의 삶은 트로이 전쟁이나 6·25전쟁처럼 진정한 승자가 없는 교착 상태입니다. 삶은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것, 모든 것이 어두워지기 전 잠시 햇살을 붙잡는 일입니다.”

● 여러 나라에서 성장 경험이 상상력 밑거름

그는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기발하면서도 몽환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많이 썼다. 동물도 자주 등장한다. 신비로우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믿음, 삶과 죽음, 진실과 허구에 대해 찬찬히 생각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와 공상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상상했던 걸 책을 통해 풀어낼 수 있게 된 건 행운이죠. 예술은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뿌리내린 꿈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은 현실이면서도 강력한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에게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동물은 상대적으로 인간보다 덜 냉소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저 같은 이야기꾼에게 매혹적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 인종이 등장한다. 여러 나라에서 성장한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외교관인 아버지 덕분에 코스타리카 멕시코 프랑스 등에서 자랐습니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접하며 사는 건 마음을 활짝 열어 줘요. 돌이켜보면 당시 경험은 숨막힐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부모님은 호기심 많고 갖가지 새로운 걸 시도하는 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따뜻하게 키워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2년 전 돌아가셨고 85세인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습니다. 두 분이 몹시 그립습니다.”

그의 소설은 작품마다 또렷한 색깔을 뿜어낸다. 다채로운 이야기의 씨앗은 어디에서 얻을까.

“작가는 진공청소기와 같아요. 빨아들인 건 대부분 쓸모없지만 가끔 귀중한 게 들어오기도 해요. 그러면 작품이 시작됩니다. 영감은 운, 갈망, 집요함, 열린 마음에서 오더라고요.”

● “네 아이 학교 보낸 후 집필”

그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년간 다양한 문학 작품에 대해 쓴 편지와 해당 책을 당시 캐나다 총리였던 스티븐 하퍼에게 보냈다. 2007년 3월 캐나다 예술위원회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하퍼 총리가 행사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서류만 보다가 떠난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총리 보좌관이 쓴 형식적인 답장 7통만 받았을 뿐 총리가 직접 쓴 편지는 결국 받지 못했다.

그는 당시 쓴 편지를 모아 에세이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를 냈다. 편지엔 문학 작품에 대한 사유와 예리함, 위트가 담겼다. 답 없는 편지를 하염없이 쓰다 시무룩해질 때도 있지만 끈질기게 이어간 편지에 웃음이 쿡쿡 나온다. 그의 게릴라(?) 같은 시도는 큰 화제가 됐고 캐나다를 넘어 세계 각국 독자들을 비롯해 작가들이 총리에게 보낼 책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유쾌한 발상과 집요함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총리가 답하지 않는다면 저는 계속 쓰겠다고 다짐했어요. 그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니까요. 민주주의는 대화예요. 총리가 4년간 한 번도 직접 답하지 않은 건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한편으론 편지를 쓰면서 책을 발견하고, 이미 읽은 책을 재발견하는 즐거움도 컸습니다. 지금 다시 문학 편지를 쓴다면 정치인이든 기업가든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내고 싶어요. 하지만 그들은 읽지도, 답하지도 않을 겁니다. 지금 우리는 심각한 존재론적 난청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는 아내, 네 아이와 캐나다 새스커툰에서 살고 있다.

“첫째는 16세, 막내는 10세에요. 10대 네 아이와 사는 건 러시아 소설책 네 권과 함께 사는 것과 비슷해요. 줄거리는 복잡하고 인물들은 계속 성장하죠. 즉,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이들이 학교에 갔을 때뿐이란 걸 의미합니다. 일주일에 딱 5일이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뒷마당에 있는 작은 작업실로 갑니다. 트레드밀이 있는 책상에서 걸으며 글을 써요. 행복한 시간이죠.”

현재 새로운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The Forgiven and the Forgotten(더 포기븐 앤드 더 포가튼)’이라는 작품인데요, 52장(1년의 주 수이자 카드 한 벌의 수이기도 하죠)으로 구성됐고 순서에 상관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글을 쓸 때 한 작품에만 집중해요. ‘선 오브 노바디’를 작업하던 중 편집자의 답을 기다리며 멕시코에서 일주일간 혼자 지낼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거예요. 쉬지 않고 써서 초고를 6주일 만에 완성했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마치 뮤즈가 미친 듯이 받아쓰게 한 느낌이었어요.”

그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문학은 고통으로 가득 찬 삶 속에서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를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얀 마텔
캐나다 작가로 1963년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코스타리카, 멕시코 등에서 자랐다. 캐나다 트렌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93년 소설집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로 데뷔한 후 장편소설 ‘셀프’, ‘파이 이야기’, ‘20세기의 셔츠’,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썼다. 2002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파이 이야기’는 50개국에 출간됐다. 에세이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도 냈다.

#연극#라이프 오브 파이#얀 마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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