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 원, 수십조 원. 최근 몇 년간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들려오는 천문학적인 기술 수출 뉴스는 국민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30년 전 글로벌 신약의 복제약을 생산하던 나라가 이제 세계적인 빅파마(초대형 글로벌 제약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액의 계약을 체결하다니, 마치 또 하나의 ‘한강의 기적’이 시작된 듯 보인다. 분명 자랑스러운 성과다. 하지만 이제 화려한 숫자 뒤에 숨은 구조와 방향성을 냉정하게 되짚어봐야 한다. 과연 우리는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인가.
법적으로 기술 수출은 합법적 이전이고, 기술 유출은 범죄다. 그러나 국가 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그 경계는 생각보다 모호하다. 중요한 것은 ‘합법성’이 아니라 ‘국가 산업 경쟁력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이다.
차세대 원천 기술이 계속 해외로 빠져나가면 국내 산업 생태계는 결국 껍데기만 남는다. 기술은 빅파마의 본사에 축적되고 우리는 일회성 계약금과 단기 성과에 안주하는 구조가 굳어진다. 기업에는 당장의 이익일지 모르나 국가 전체의 미래 경쟁력 측면에서는 뼈아픈 손실일 수 있다.
흔히 기술 수출을 ‘세계가 인정한 쾌거’로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빅파마의 의사결정은 감동이 아닌 철저한 자본 논리를 따른다. 그들이 기술을 사들이는 목적 중에는 자사 기술보다 우수해서인 경우도 있지만 경쟁 기술을 선점해 시장 진입을 차단하거나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실제로 소액의 계약금으로 기술을 도입한 뒤 개발을 지연시키다가 결국 반환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 국내 기업은 골든타임을 놓치고 시장 기회를 상실한다. 기술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전략에서 패배한 것이다.
대부분의 바이오 기술은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정부 연구개발(R&D) 투자를 토대로 탄생한다. 하지만 기술 수출로 발생한 막대한 수익은 기업의 재무제표로만 귀속될 뿐 국가 전략이나 산업 생태계 강화로 환원되는 체계는 부족하다. ‘사회적 투자, 성과의 사유화’가 반복된다면 국민은 비용만 부담하고 미래 산업 주도권은 외국 기업에 내어주는 아이러니가 계속될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스스로 기술 수출을 최종 목표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단기 실적 중심의 경영 구조 때문이다. 신약 하나를 글로벌 블록버스터로 키우는 데는 10∼15년이 걸리지만 기술 수출은 몇 년 안에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단기 재무 성과에 길든 산업은 결코 강해질 수 없다. 기술을 파는 데 급급한 산업이 과연 지속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까.
해법은 기술 수출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전략의 판을 바꾸는 것이다. 단순한 권리 이전을 넘어 직접 판매권을 쥐고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모델로 이동해야 한다. 최소한 후기 임상까지 직접 수행해 수익성과 시장 지배력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의 결단은 물론 정부 역시 △국내 기술 이전 인프라 구축 △기술 가치 평가 고도화 △후기 임상 및 글로벌 허가 비용에 대한 전략적 지원 △국가 핵심 바이오 기술 보호 체계 마련 등에 힘을 보태야 한다.
제약 산업의 세계화는 안방에서 기술을 파는 행위로 완성되지 않는다. 직접 해외 규제 장벽을 넘고 유통망을 구축하며 글로벌 판매 전쟁의 최전선에 뛰어들 때만 가능하다.
이제 제약 바이오산업은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계속 기술을 팔아넘기는 ‘계약금 강국’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기술로 세계 시장을 직접 지배하는 ‘신약 강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이 대전환의 원년을 맞이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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