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반군지도자의 의회연설

  • 입력 2001년 3월 28일 15시 53분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멕시코에서 벌어졌다.

검은색 마스크에 다 해진 황토색 모자를 눌러 쓴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전설적인 지도자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28일 멕시코 연방의사당에 섰다.

마르코스 부사령관과 3명의 반군 지도자는 이날 2시간에 걸쳐 멕시코 전역에 TV로 생중계된 의회 연설을 통해 “차별 받는 원주민 권리법안을 통과시켜 주면 평화협정 체결에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

이어 연설에 나선 국가원주민의회(NIC) 소속 의원 3명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새로운 멕시코를 출발시키자”고 거들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연설 내내 특유의 카리스마와 선동적인 화술로 원주민 권리법안의 정당성을 역설해 직접 이를 들은 의원들은 물론이고 TV를 시청한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정부와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반군 지도자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에서 연설한다는 것은 전무한 일이기 때문에 멕시코는 물론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달 24일부터 3000여㎞에 이르는 거리의 평화행진을 마치고 이 달 중순 수도 멕시코시티에 입성한 반군지도자 25명은 정부와의 협상 시도에 실패하자 당초 본거지인 치아파스주의 라칸돈 정글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의회가 22일 야당의 주도로 초청 연설을 전격 통과시키자 오히려 전세계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펴는 호기(好機)를 갖게 됐다.

사실 반군 지도자들이 의사당에 서기까진 비센테 폭스 대통령의 공로가 가장 컸다. 폭스 대통령은 여당인 국민행동당(PAN) 지도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정착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며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연설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폭스 대통령은 27일 반차별단체와의 회동에서도 “우리의 원주민 형제들은 착취와 약탈, 차별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며 평화 분위기를 조성했다.

반군 지도자들의 이날 연설은 멕시코 국민에게 뜨거운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물론이고 의회에 대해서도 무언(無言)의 압력을 가해 계류 중인 원주민 관련 법안의 통과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의회 연설’을 조건으로 지금까지 수차례 폭스 대통령의 협상 제의를 거부해온 반군측이 더 이상 협상을 거부할 명분이 없어져 1996년 중단된 양측간의 평화협상이 머지 않아 재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마르코스 부사령관도 의회가 연설을 허용한 직후 “대화를 위한 문이 활짝 열린 것 같다”고 말해 이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이종훈기자>taylor5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