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에도 「쉰들러」있었다

  • 입력 1999년 3월 21일 20시 48분


예술계에도 ‘쉰들러’가 있었다.

2차 대전중 나치 독일로부터 당대 최고의 유태계 예술가와 지식인 등 4천여명을 구해낸 ‘예술계의 쉰들러’는 미국인 베리언 프라이.

영국의 더 타임스는 최근 그의 회고록이 출간된 것을 계기로 드라마틱한 그의 삶을 크게 보도했다.

그는 프랑스 남부해안의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한 돈많은 상속녀의 도움을 받아 유태인 구출작전을 폈다.

나치의 박해로부터 그가 목숨을 걸고 구해낸 이들 가운데는 ‘콧수염 달린 모나리자’의 화가 마르셀 뒤샹, ‘몽환적 낭만’의 화가 마르크 샤갈, ‘인간의 조건’의 지은이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 현대 초현실주의 화풍의 거장 막스 에른스트 등 금세기 세계문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이들이 포함돼 있다.

고수머리에 굵은 뿔테 안경을 쓴 프라이는 겉으로 보면 학자같지만 그가 펼친 유럽 지식인 구출 작전을 보면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못지않은 민첩함을 자랑했다.

하버드대를졸업한그는미국의 잡지 ‘리빙 에이지’의 통신원으로 파리로 건너갔으며 35년 베를린 여행길에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을 목격했다. 그 충격은 컸다.

잠시 미국에 돌아갔다 프랑스로 재입국할 때 그는 ‘미국 긴급구조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여사로부터 특수명령을 받은 밀지를 발목에 묶은 채였다. 엘리너여사는 나치에 쫓기는 유럽 지식인 2백명의 명단과 3천달러의 활동자금을 그에게 준 것이었다. 공작기간은 3주. 그는 이 지시를 어겼다. 13개월 동안 4천여명을 구해낸 것이다.

프라이는 남부 항구 마르세유의 스플랑디드 호텔 3층에 비밀 거점을 마련했다. 마르세유는 아직 독일이 점령하지 못했던 곳으로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지식인들의 대기소 같았다.

이때 그를 가장 많이 도왔던 이는 미국 시카고 출신으로 거부의 상속을 받은 메리 제인 골드라는 미인. 여행길에 마르세유에서 프라이를 만난 그는 곧 동조자가 돼 막대한 탈출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유럽의 지식인 구출에 별 관심이 없던 미국인 관료들을 설득하는 데도 정열을 쏟았다.

프라이는 이런 인맥을 활용해 미국 행정부 고위직의 친구들과 외교관들을 설득해 지원을 얻어냈다. 돈세탁, 비자 여권 신분증 위조도 능란하게 해치웠으며 도보나 배편을 이용해 피란민들을 스페인 등지로 탈출시켰다.

당시 프랑스 비시 괴뢰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미국 국무부 관료들이 그를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4천명 이상도 구해냈을 것이라고 더 타임지는 아쉬워 했다.

프라이는 탈출작전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67년 숨질 때까지 이런 선행을 숨긴 채 라틴어 강사로 조용히 지냈다. 프랑스는 그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려 숨지기 직전 최고 훈장으로 꼽히는 뇌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여생 동안 유태인 대학살에서 구해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는 눈 앞에서 처형된 한 여인을 결코 잊지 못한다. 단 5분만이라도 처형 순간의 그 여자의 표정을 잊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끝내 나에게 그런 안식의 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의인(義人)다운 회고록의 한 구절이다.

이슬라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은 98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그를 위한 전시실을 만들었다. 또 그가 탈출작전의 거점으로 삼았던 마르세유시에서는 지난 주부터 ‘프라이 기념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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