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요르단 후세인王]이-팔 평화협상에 큰 역할

  • 입력 1999년 2월 8일 07시 20분


7일 63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세인 이븐 탈랄 요르단 국왕은 생전 ‘분쟁의 해결사’ ‘줄타기 외교의 명수’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바람 잘 날 없는 중동지역에서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작은 왕국을 46년동안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군주에 대한 찬사였다.

17세에 왕이 된 그는 노련한 외교술과 정치적 센스를 통해 소국 요르단을 강대국의 틈새에서 잘 지켜냈다. 서방 외교관들은 후세인이 수시로 말을 바꾸고 입장을 뒤집는데도 미움을 사지 않는 특이한 인물이었다고 평한다. 후세인은 35년 11월4일 암만에서 태어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이슬람학교를 거쳐 영국의 샌드허스트 왕립군사학교에서 공부했다. 할아버지 압달라 국왕의 암살에 이어 즉위한 아버지가 52년 8월 건강이 나빠져 퇴위하면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영국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지 몇달 안 된 17세 소년국왕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요르단은 경제적으로 낙후하고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아랍민족주의의 위협을 받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탓에 즉위 초반 음식물과 코치료약에서 독극물이 잇따라 발견되는 등 11차례의 암살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 아랍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해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을 이스라엘에 빼앗기는 어려움을 겪었다.

후세인은 정당활동 금지와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 등을 통해 권력기반을 다졌다. 70년 9월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인들이 봉기하자 무력으로 진압, 무려 3천여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하는 대참극이 빚어졌다.

후세인의 외교는 70년대부터 꽃피기 시작했다. 아랍권과의 관계를 개선, 80년과 87년 각각 아랍정상회의를 성사시켰으며 88년에는 요르단강 서안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대표권을 인정했다.

91년 걸프전 때는 이라크를 지지했으나 94년에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수완을 발휘했다.‘줄타기 외교의 명수’라는 별명은 이 때 생겼다.

후세인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협상 중재를 위해서도 진력, 지난해 10월 미국 워싱턴 근교 와이밀스에서 열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협상이 난관에 빠지자 투병중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달려가 협상을 성사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비행기를 좋아해 수시로 전투기나 여객기를 조종했고 승마 수영 등 각종 스포츠에도 능했다. 네번째 부인인 누르왕비를 포함, 모두 4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11명의 자녀를 뒀다.

〈윤양섭기자〉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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