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나 SNS에서 억 단위 투자나 정책 자금, 각종 사건·사고를 접하다 보니 숫자 감각이 무뎌지기 쉽지만, 일상으로 환산하면 체감은 전혀 다릅니다. 단품 기준 6천 원짜리 햄버거로 계산하면 약 1만6천 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요. 하루에 하나씩 먹어도 40년이 훌쩍 넘는 분량입니다. 세트 메뉴를 1만 원으로 잡아도 1만 세트로, 매일 하나씩 먹어도 27년이 걸립니다.
커피로 바꿔 보면 더 직관적입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4천 원으로 계산하면 2만 5천 잔에 해당하는 금액인데요. 하루 두 잔씩 마셔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커피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입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이어진 불경기 속에서 만 원 단위 지출조차 한 번 더 고민하게 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1억 원이라는 금액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돈이죠.
돈을 들고있는 사람 / 사진: 엔바토엘리먼트
그럼에도 취미의 영역인 게임 펀딩 시장에서 ‘억’ 단위 자금을 모은 사례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사실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닌데요. 국내보다 이른 시기에 크라우드 펀딩 문화가 자리 잡았고, 참여 인원과 자본 규모 자체가 워낙 크기 때문입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약 14억)’, ‘쉔무 3(약 106억)’처럼 잘 알려진 게임들 역시 펀딩을 통해 억 단위 제작 자금을 마련한 대표적인 사례죠. 2012년 펀딩을 시작한 이후 아직도 정식 출시가 안 됐지만, 8억 달러(약 1조 1,812억)의 후원금을 모은 ‘스타 시티즌’도 존재하고요.
킥스타터 펀딩을 진행했던 쉔무3 / 사진: 킥스타터 홈페이지 캡처 가장 대중적인 해외 펀딩 플랫폼인 킥스타터 기준으로 보면 디지털 게임 가운데 10억 원 이상을 모은 프로젝트만 99개에 달합니다.
반면 국내 환경은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게임 펀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용자 풀 자체가 해외 시장에 비해 크지 않고, 크라우드 펀딩 구조 자체의 ‘먹튀’ 논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도 여전히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죠.
이런 제약 속에서도 국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게임 펀딩이 열리는 플랫폼인 텀블벅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디지털 게임 기준으로 1억 원을 넘긴 프로젝트는 총 16개입니다. 이 가운데 운영 문제로 서비스가 종료됐거나 ‘먹튀’ 의혹이 제기된 사례를 제외해도 정상적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게임은 약 13개 정도로 정리됩니다.
상당한 펀딩액을 모은 국내 작품들 / 사진: 텀블벅 홈페이지 캡처이렇게 성공한 게임들을 쭉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경향성이 보이는데요. 완전히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이미 한 차례 이용자에게 얼굴을 비췄던 IP이거나, 특정 취향층이 확실한 장르라는 점이 공통적으로 눈에 띕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존 IP를 활용한 프로젝트입니다. 귀여운 캐릭터 ‘오구’를 주인공으로 한 어드벤처 게임은 이미 이모티콘 등으로 인지도를 쌓은 상태에서 펀딩을 시작했고, 그 결과 후원자 6,096명이 참여해 펀딩액 약 1억 9천만 원을 달성했습니다. 괴물 경영 시뮬레이션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프로젝트 문 역시 후속작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를 통해 후원자 1,389명이 모이며 약 2억 6천만 원을 기록했죠. 이미 친숙한 세계관과 개발사에 대한 신뢰가 자연스럽게 펀딩 참여로 이어진 셈입니다.
무려 14억을 모은 산나비의 굿즈 펀딩 / 사진: 텀블벅 홈페이지 캡처참고로 ‘산나비’는 게임 본편 펀딩에서는 약 7천 2백만 원을 모으며 1억 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후 게임성과 완성도를 인정받은 뒤 진행된 굿즈 펀딩 ‘한정판 산나비 오피셜 아트웍스 & 미공개 데이터팩’이 무려 14억 원을 달성하며 텀블벅 게임 카테고리 역대 최고 금액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익숙한 IP에 대한 선호도가 보인다 / 사진: 텀블벅 홈페이지 캡처비슷한 흐름은 웹툰 IP를 활용한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웹툰 누적 조회수 8억 뷰를 기록한 ‘타인은 지옥이다’를 원작으로 한 방탈출 어드벤처 게임 ‘타인은 지옥이다: 무혐의’는 후원자 951명이 참여해 약 1억 1천7백만 원을 모았습니다. 이미 검증된 스토리를 게임이라는 형태로 다시 경험하고 싶어 하는 수요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죠.
성공한 프로젝트 중에서는 의외로 BL·GL 장르의 비중이 많았다 / 사진: 텀블벅 홈페이지 캡처의외로 BL·GL 장르의 존재감도 상당히 컸습니다. 2000년대 후반 동인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BL 육성 시뮬레이션의 리마스터 작인 ‘어이쿠 왕자님’은 후원자 1만 5,690명이 참여해 13억 5천만 원이 넘는 금액을 기록했는데요. 같은 개발사의 동양풍 추리 어드벤처 BL 게임 ‘허잇차! 세자님’도 후원자 3,115명이 모이며 약 3억 2천만 원을 달성했습니다.
이어 고수위 BL RPG ‘제로웨이크 게이트’ 역시 후원자 수는 448명으로 많지 않았지만, 최종 펀딩액은 1억1천만 원을 넘기며 후원자들의 구매력을 보여줬습니다. GL 연애 시뮬레이션 ‘탐정뎐’ 또한 후원자 2,331명이 참여해 약 2억 원을 모았는데요. BL·GL 장르는 상대적으로 여성 이용자 선호도가 높은 편인데, 텀블벅 자체가 여성 이용자 비중이 높은 플랫폼이라는 점도 이런 결과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돌 앨범 펀딩이나 굿즈 공동 구매 등 디지털 기반 후원·결제 문화에 비교적 익숙하다는 점도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연애 시뮬레이션의 기세도 안정적인 편 / 사진: 텀블벅 홈페이지 캡처물론 전통적인 미연시 장르도 빠지지 않습니다. 인기 인디 연애 시뮬레이션 러브 딜리버리의 후속작 ‘러브 딜리버리 2’는 후원자 2,894명이 참여해 약 2억 2천만 원을 기록했고, ‘신도 야근을 하나요?’는 2,081명이 참여해 1억 2천만 원을 넘겼습니다. 이혼녀를 모티브로 한 독특한 소재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시크릿 커리큘럼’ 역시 후원자 1,532명으로 1억 원을 넘기며 안정적인 성과를 냈는데요.
비교적 개발 진입 장벽이 낮은 장르인 만큼 고품질 게임들이 다수 등장하며 장르 전반의 완성도가 상향 평준화됐고, 캐릭터와의 정서적 교류를 중시하는 장르 특성상 충성도 높은 팬층이 형성돼 있다는 점도 펀딩 성과로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틈새 강자로는 리듬게임이 있었는데요. 캐릭터 기반 PC 리듬게임 ‘플라티나 랩’은 후원자 2,115명이 참여해 약 1억 4천만 원을 달성했고, ‘칼파 PC 완전판’ 역시 1,738명의 후원으로 약 1억 3천만 원을 모았습니다. 비교적 대중성은 낮은 장르지만, 취향이 맞는 이용자들이 강한 결속력을 보여준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이처럼 국내 게임 펀딩 시장은 아직 규모 면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분명한 취향층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들이 하나둘씩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는데요. 앞으로는 어떤 게임들이 이 흐름을 이어받아 성공적으로 펀딩을 마무리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이용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지켜볼 만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