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 공형진 “업복이가 아니라 천지호 할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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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8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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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드라마 ‘추노’에서 양반 신분질서에 반기를 든 노비 업복이를 연기한 배우 공형진. 동아일보 자료사진
KBS2 드라마 ‘추노’에서 양반 신분질서에 반기를 든 노비 업복이를 연기한 배우 공형진. 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는 개죽음 당하지 않을 거라니. 우리가 있었다고 우리 같은 노비가 있었다고 세상에 꼭 알리고 죽을 거라니. 그렇게만 되면 개죽음 아니라니. 안 그러냐. 초복아."

총 4자루 등에 짊어지고 나라님 사시는 궁으로 유유히 들어가, 그야말로 '원 샷 원 킬'로 높으신 양반님네 '대갈빼기'(머리)에 총알을 박은 '추노'의 그 남자, '조선시대 스나이퍼' 업복이 공형진(41)을 만났다.

최근 종영한 KBS 2TV '추노'(천성일 극본, 곽정환 연출)는 마지막까지 녹록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끝까지 사람 마음 졸이게 하다가 끝내 눈물을 쏟게 했다.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노비가 지엄한 궁궐에 홀홀 단신으로 들어가 부조리한 세상의 원흉인 좌의정을 쏴 버렸다. 궁궐 수비대에게 붙잡혀 바닥에 누운 업복이와 궁궐 밖에 있던 또 다른 노비 반짝이 아버지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공형진을 만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길이(장혁)도 태하(오지호)도 못한 일을 업복이가 해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 '추노'의 진정한 주인공은 노비 업복이

‘추노’에서 도망쳤다 붙잡혀 벌로 얼굴에 ‘노(奴)’자가 새겨진 업복. KBS 제공
‘추노’에서 도망쳤다 붙잡혀 벌로 얼굴에 ‘노(奴)’자가 새겨진 업복. KBS 제공

5일 식목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만난 공형진은 데뷔 20년 만에 처음으로 작품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을 끝내면 시원했는데, 이번 작품은 안 그래요. 지금도 총 들고 뛰어다녀야 할 것 같고 배우들과 스태프에게 전화를 하고 괜히 제 뺨에 노비 문신을 해야 할 것 같고… 섭섭함이 많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가 많고, 추노 팀과 정도 많이 들었어요."

공형진이 맡은 업복이는 관동지방 최고의 포수였지만 빚 때문에 노비가 됐다. 주인집에서 도망쳤다가 추노꾼 대길 패거리에게 붙잡혀 도망노비 문신을 얼굴에 새겼다. 업복이는 양반의 간계로 노비당이 몰살당하자 홀로 궁궐에 들어가 조총으로 좌의정 이경식(김응수)과 좌의정의 첩자 그 분(박기웅)을 죽인다.

공형진이 연기한 업복이를 가리켜 곽정환 PD는 "나의 페르소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평했다.

이에 대해 공형진은 "업복이가 드라마의 실제적인 주인공이라고 하는 건 일차적으로 선배에 대한 예우인 것 같고, 둘째로 끝까지 소신을 놓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 희망을 주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비 초복이(민지아)를 사랑했던 업복이는 "초복이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하면서도 죽을 자리를 찾아 궁으로 갔다. 공형진에게 "당신이 생각한 결말과 차이가 있는지"를 물었다.

"많은 분이 '나 같으면 초복이와 도망갔을 텐데'라고 말했어요. 비극적인 최후를 분명히 직감하고 있었을 것인데 그게 업복인 것 같습니다. 내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소신과 신념을 놓지 않겠다. 그것이 주변 동료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끝맺음이 아닌가 하는 마음, 멋지지 않나요? 저는 그런 부분이 좋았어요."

▶ "추노 시즌 2? 감독과 작가만 같다면 OK"

KBS2 드라마 ‘추노’의 출연배우. 공형진, 장혁, 이다해, 오지호, 이종혁(왼쪽부터). 스포츠동아 임진환 기자
KBS2 드라마 ‘추노’의 출연배우. 공형진, 장혁, 이다해, 오지호, 이종혁(왼쪽부터). 스포츠동아 임진환 기자

1990년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데뷔한 공형진은 이후 '박하사탕'(1999), '파이란'(2001),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얼굴을 알렸다. SBS 드라마 '연애시대', KBS '달자의 봄' 등 브라운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해 여름 곽정환 PD는 당시 그가 출연했던 뮤지컬 '클레오파트라' 현장에 대본을 들고 찾아왔다. 하지만 그에게 사극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 남자는 원시인'이라는 1인극을 하기로 돼 있었다. 영화 '방자전'도 찍어야 했고 SBS 파워FM '공형진의 씨네타운'과 케이블 방송 tvN '택시'의 진행자까지 맡고 있었다.

벌 여놓은 일들이 많아 양심상 '추노' 출연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곽 감독은 다시 그를 찾아와서 "형님이 아니면 안 된다. 중심을 잡아주셔야 한다"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저에게 천지호 역할을 얘기했어요. 그래서 천지호 역할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업복이 역할을 제안했습니다. 꼭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도저히 피할 수 없었어요. 나를 정말 원하는구나 싶어서 의기투합하기로 했어요. 스케줄을 조정해서 지난해 8월 '추노' 팀에 합류했죠. 업복이는 기존 코믹한 제 이미지와 다른 점이 마음에 들었고, 초복이와 멜로가 있었어요. 가슴 아픈 사랑이 될 것 같았죠. 또 남들 다 칼 들고 다니는데 총 들고 다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업복이 특유의 강원도 사투리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배우 강혜정, 강원도 출신 유오성의 말투를 참조했다. 벌여놓은 일이 많은 탓에 촬영 스케줄 조절도 만만치 않았다. '내 남자는 원시인' 공연이 있을 때는 '추노' 팀에게 하루 반나절의 시간을 배분했다. 그가 가면 촬영장에선 20신~30신 그의 분량만 내리찍었다. 대신 연극이 끝난 2월부터는 일주일에 4, 5일씩 '추노'에 전념했다.

멜로 욕심에 덜컥 업복이를 맡았지만 쉬운 배역은 아니었다. 추운 겨울날 그는 맨발에 짚신만 신고 개울가에서 주인 양반 드실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아무래도 추웠던 기억이 제일 크죠. 양반 옷은 안감이 달라요. 저는 노비이다 보니까 안감을 댈 형편도 아니고 12월이 되니 버선이 생기긴 했지만 대단히 추웠어요. 짚신이라는 게 젖으면 잘 안 말라요. 현장 분위기를 위해서 일부러 NG를 내고 아이스크림을 산 적도 있죠. 아이스크림 40~50개 사서 1분 만에 먹기 내기를 했어요."

노비 노릇 하느라고 생고생을 했지만 여전히 그는 '추노'에 애정이 많다. 그는 '추노 시즌 2'에 합류할 생각도 있다. 같은 작가와 같은 감독이라면 말이다.

"배우 공형진에게 추노란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이미지 변신에 강박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제가 이런 진지한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습니다."

▶ 배우로서 겪는 우울, 그리고 고(故) 최진영…

"사람 사는 게 참 그래. 어느 목숨 하나 사연 없는 목숨이 없는 것 같고." -추노 中 업복이 대사-

2008년 준비했던 영화 네 편이 줄줄이 엎어졌다. 2009년 연극부터 케이블 방송까지 전력으로 매달린 건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어느 날 문득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졌다.

"' 군중 속 고독'이라고 해야 하나. 가장 정신없을 시기에 누군가한테 위로받고 싶고. 그래서 더 업복이에게 매달렸을 수도 있죠. 아직 우울은 진행형인데, 답을 모르겠어요. 새로운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면 거기 빠져서 사느라 이런 생각 하지 않을 것 같고. 연예계는 그리 호락호락한 동네가 아니에요. 부침이 심하죠. 배우와 우울은 어쩌면 뗄 수 없는 관계인지도…."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가 걱정스러워 우울을 나이 탓으로 돌렸다. "연예인이 아니라도 남자 나이 마흔 전후가 되면 다들 그런 소리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전형적인 AB형 성격이라고 했다. 겉으로는 외향적이고 웃긴 B형 같지만, 속으로는 예민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A형 같은 소심한 기질이 있다면서.

배우에게 우울증은 치명적이다. 공형진은 얼마 전 세상을 뜬 고(故) 최진영의 조문을 다녀왔다. 그와 고인은 같은 영화로 데뷔했다. 고인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담배 한 대만 피겠다며 인터뷰를 끊었다.

"누나(최진실) 장례식 후 진영씨가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고맙다며 앞으로는 자주 보자고 했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그리고 그 비보를 접했습니다. 어머니라도 뵈어야 할 것 같아 혼자 갔는데, 그 어머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두 자식을 다 그렇게…. 드릴 말씀이 없더라고요. 그 친구가 그야말로 편안하게 영면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전에는 자살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싫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배우라는 직업이 아이러니한 게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족에게 희생을 요구해요. 당연히 그런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지만 그럼에도 직업에서 오는 괴리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몇 번 했어요."

5일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의 한 미용실에서 배우 공형진(41)을 만났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5일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의 한 미용실에서 배우 공형진(41)을 만났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 데뷔 10년 차에 아버지가 인정, 그러나 연예인 지망하는 아들과는…

그는 중앙대에서 연극영화과를 전공하고 1990년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배우가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증권회사 사장을 지낸 부친은 장남이 연예인이 된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열흘 남짓 숙고한 끝에 "네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널 도울 만한 여력과 마음은 없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부친에게 처음 인정을 받은 것은 영화 '파이란'에 출연하고 나서다. 이미 데뷔 10년 차가 됐을 무렵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아버지가 제 직업을 인정해 주셨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와 친해졌습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시절만 해도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대단했어요. 자격지심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 감히 필적하지 못할 분이라고 여겼어요."

지금 그는 연예인을 지망하는 중학생 외아들과 냉전 중이다. 아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도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속으론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은 서투른 아버지.

" 솔직히 연예인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애가 둘 셋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아이가 저 같은 짓을 많이 하기 때문에 속이 복작복작 타 들어가고, 이러다간 아이와 사이가 안 좋아질 수 있겠구나 싶어서 참으려 하지만 결국엔 화만 내고…. 저 혼자 있을 때는 좋은 아버지상을 생각하면서 결심하지만 아이와 마주하는 순간 감정이 폭발하고. 아주 그것 때문에 죽겠어요."

3월 ‘액터스 초이스’의 지진희, 이하나, 장동건, 황정민, 김승우, 공형진(왼쪽부터)이 합창곡 ‘위’(WE)를 발표했다.
3월 ‘액터스 초이스’의 지진희, 이하나, 장동건, 황정민, 김승우, 공형진(왼쪽부터)이 합창곡 ‘위’(WE)를 발표했다.

▶ "톱스타 장동건도 여느 신랑처럼 긴장"

공형진에게 5월 결혼하는 절친한 동료 장동건·고소영 커플의 이야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동건 커플의 교제 사실을 미리 안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을 자신의 부인에게도 숨길 정도로 의리를 지켰다.

그에게 "장동건도 결혼을 앞둔 여느 신랑처럼 긴장하고 고민하느냐"고 물었다.

" 왜 안하겠어요? 요새도 하루에 대여섯 번씩 통화해요. 처음 교제 사실을 알았을 땐 '동건아, 네 결정이 옳길 바라고 옳다고 본다'고 했어요. 건강하게 행복하게 아들 딸 잘 낳고 사회 모범이 돼서 잘 살길 바라면서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준비하라고 얘기해 주고 있어요. '이러이러한 상황이 올 때가 있다. 그때 형은 이렇게 했다'는 조언이죠. 하지만 제가 둘 다 워낙 잘 아는 친구라 잘 살 거라고 봐요."

현재 공형진은 1인극 '내 남자는 원시인'의 지방 공연을 앞두고 있다.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부산 해운대 문화회관, 5월 15일부터 16일까지 대구시민회관에서 공연된다.

그는 "차기작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스릴러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기존에 해왔던 역할이든 아니든 어떤 배역이 들어와도 충분히 소화해내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업복이 만큼 멋진 그의 다음 모습을 기대해 본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O2/집중분석] 배우 공형진 동영상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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